▲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한 장면.
TvN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전교 1등 승완이가 폭력을 일삼는 교사를 비판한 일을 두고, 교사가 반성문을 쓰고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승완이는 자퇴를 하겠다고 한다. 승완의 엄마는 그런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학교로 찾아가 폭력교사 앞에서 당당히 말한다.
"우리 승완이야 이딴 학교 자퇴한다고 흠집이나 나겠어? 자퇴 서류 갖고 와요! 당장 사인하게."
명징하고 통쾌한 승완 어머니의 활약은 분명 멋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이 두 모녀가 자퇴를 결정하며 나눈 대화가 더욱 마음에 담겼다.
승완 : "나는 반성문도 못쓰겠고, 사과도 못하겠어.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
승완엄마 : "자퇴밖에 방법이 없니? 전학 가는 방법은?"
승완 : "그건 내 잘못을 인정하는 거라서 안돼."
승완엄마 : "수능은?"
승완 : "못 봐. 검정고시 쳐야 돼서..."
승완엄마: "그럼 지금까지 달려온 1년을 버리겠다는 거네."
승완 :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
승완엄마 : "니 인생에서 1년을 버릴 만큼 이 문제가 너한테는 중요한 문제니?"
승완 : "응. 엄마, 미안해."
승완엄마 : "휘어지는 법도 알아야 돼, 승완아. 부러지는 법 만으로는 세상 못 살아."
승완 : "알아, 근데 아직 그게 잘 안돼... 미안해... 미안해 엄마."
승완엄마 : "아니야. 승완아, 엄마가 미안해."
승완은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엄마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기 싫은 일, 반성문을 쓰고 사과를 하는 대신 자퇴를 하며 소신을 지킬 수 있었다. 휘어지지 않고 부러지기를 택한 것이다.
이제 다 자라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 나지만 비슷한 질문을 하곤 한다. 다만 물어볼 선생님이 없으니 나 자신에게 반문한다. 회사는 매일 가야 할까? 보고서는 꼭 써야 할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상사의 지시를 반드시 따라야 할까?
최근 회사의 장이 바뀌면서 업무 파악 겸 직원 상견례를 위한 업무 보고 일정이 예정되어 있다. 연간 업무 흐름도(계획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공문이 시행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촉박한 기한을 명시하여 월별, 주차별, 날짜별 흐름도를 추가로 요청하는 공문이 왔다.
기관장에게 하는 보고는 연간 일정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외 구체적인 세부 일정들은 부서의 상황에 맞게 부서장의 지휘 아래에서 각 업무 담당자들이 시행하면 될 일이며 그때마다 필요한 사항들은 당연히 기관장에게 보고를 하기 마련이다.
서식에 맞게 칸을 채우면서도 불필요하게 직원들의 업무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달된 공문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일도 불가능하다. 업무를 하다 보면 이보다 더 가슴 답답한 일들이 많은 데다 나 혼자만 안 할 수도 없고 팀, 과장님과 이 문서를 시행한 부서의 상황도 있으니 말이다.
사소한 일마다 부러지기를 택했다면 몸뚱이가 남아나질 못했을 거다. 이번에도 휘어지기를 택했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같은 남편이 있지 않은가. 시일보다 일찍 팀장님께 제출했고 팀장님의 보완을 거쳐 문서는 늦지 않고 제때 제출이 되었다.
사는 일은 그런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며 살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하기 싫은 일까지도 하면서 산다. 그러나 정말 휘어질 수 없다는 판단이 서는 그런 날에는 부러지기도 할 것이다. 흠집이 나기는커녕, 아니 흠집이 조금 난다 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는 걸 안다.
나이는 아무 노력없이 얻어지는 공짜가 아니다. 나이테가 늘어날수록 둘레도 커지고, 뿌리도 깊어지는 나무처럼 마흔 하나를 사는 오늘도 내일도, 매일 마음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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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보았다가도 또 생각나서 찾아 읽게 되는, 일상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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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겠어, 그냥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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