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심기를 재활운동이라 말해주던 남편과 지인께 감사하며어쩌다 같은 사연으로 중년 삶의 동기간이 된 남편과 환우지인
박향숙
지난해 3월에 새로 만난 텃밭은 양지바른 곳이었다. 대나무로 층층이 메워진 작은 동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푸릇한 보리잎으로 가득 채운 농토는 풍요로움으로 넘실거렸다. 아무거나 심어도 다 잘 된다고 만나는 마을사람들마다 이구동성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감자, 고추, 호박을 비롯해서 심은 작물마다 모두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
가을배추와 무를 심어 김장재료를 준비했고 우리 오형제와 이웃들에게 줄 겨울 김장까지 완벽하게 텃밭농사를 마무리했다. 연초의 계획대로 텃밭 작물판매로 얻은 기부금을 지역의 소외이웃과 나눴다. 그리고 새해 3월을 기약하며 텃밭으로의 발걸음을 멈췄다.
때론 평범한 일상에 혼선의 열차가 들어올 때가 있는데 텃밭농부로서의 내 모습을 어지럽게 한 것이 바로 책방이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더 기운 떨어지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책방이었다. 무슨 행운인지 책방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고 앞뒤 재지 않고 일을 진행시켰다. 그사이에 새해도 왔고 3월도 찾아왔건만 시간이 계속 머무는 줄만 알았다.
얼마 전 남편이 텃밭에서 만들어온 매화가지 꽃꽂이를 보면서야 텃밭 생각이 났다. 함께하는 지인이 올해는 감자를 안 심을 거냐고 물었을 때 작년 감자 수확이 떠올랐다. 감자를 캘 때 엄청난 감자알이 줄줄 따라 올라와서 벌어진 내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던 그때를 생각만 해도 좋았다.
"대야시장에 가서 작년에 샀던 감자씨 사다가 서서히 심을 준비하게요. 올해는 기계로 밭갈이도 안 한다고 하니까 당신이 두둑도 만들어야 하고 할 일은 많고 걱정이야."
"당신이 갑자기 일이 늘어나서 그게 더 걱정이지. 밭 정리만 하면 일의 절반이 끝나는 거니까 걱정마소. 그나저나 작년처럼 좋은 감자씨가 없을 수도 있으니 서두르세."
다음날 일찍 밭에 가서 괭이와 갈퀴로 잡초들을 거뒀다. 남편은 괭이로 잡초를 캐내고 내가 그것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는데 텃밭의 원 주인이 나와서 한마디 거들었다. 부지런한 남편 모습이 안 보여서 올해는 그만두나 궁금했다고. 다른 사람들은 종종와서 벌써부터 감자도 심고 상추씨도 뿌렸다고. 지난해에 농사를 제일 잘 지었으니 올해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감자씨를 구하러 대야 오일장 시장에 갔다. 아뿔싸. '감자를 진작에 심었어야지 이제 오면 씨가 없다'고 농약상 주인이 말했다. 대야시장을 다 돌고, 다시 군산에 와서 역전시장을 다 둘러봐도 감자씨가 없었다. 작년하고 비교하면 겨우 10여 일 차이인데, 벌써 감자심기에 늦었단 말인가. 역시 농사는 때가 있는 법이구나. 가는 곳마다 말품을 팔고 왔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물리치료를 하러 간 남편에게 상황을 얘기하자 '올해는 감자를 못해도 할 수 없지. 주어진 대로 다른 것 심어보세'라고 했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다 물어봐도 '너무 늦었다'는 답만 돌아왔다. 하지만 오로지 감자에 맺힌 내 마음따라 텃밭에 다시 가서 만들어놓은 두둑을 보며 분명 무슨 해답이 있겠지 하며 쓰린 속을 달랬다.
다음날 학원에 어디서 본듯한 사람이 들어섰다. 얼마전 책방으로 남편과 함께 온 소위 병원동기였다. 이분 역시 뇌졸중으로 고생하며 후유증으로 정기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였다.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감자씨를 가져왔다고 했다. 본인의 근무지인 서천에서 농사짓는 할머니들한테서 얻은 것이라고,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했다. 세상에나 이렇게 많은 감자씨가!
동네방네 감자씨를 구한다는 나의 소망을 남편이 대신해서 병원 동기들에게 전했단다. '우리 각시가 감자씨가 있어야 글을 쓴다'고 했단다. 남편 지인은 언뜻보기에도 불편한 다리로 감자씨를 건네줬다. 갖가지 사연을 담고 줄줄이 딸려나올 감자알을 생각하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
다음날 나의 첫 임무는 감자심기였다. '오늘 아니면 절대 안된다'는 결기로 남편과 함께 밭으로 갔다. 한식날에 비가 오면 풍년이라면서 보내준 지인의 한시를 읽으면서 감자 심는 조선의 여인을 꿈꿨다. 나이들면 별것도 아닌 것으로 삶의 모양새를 갖춘다더니 내가 꼭 그랬다. 그래도 감자씨를 꼭 쥔 나는 진짜 농부처럼 저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감자를 심기에 딱 좋은 이슬비를 맞은 밭에 감자용 비닐을 두르기 시작했다. 밭농사를 준비할 때마다 느끼지만 남편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괭이질 하나, 비닐 잡는 것 하나도 깔끔하게 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도 늘 따뜻한 손길과 말로 격려를 해주는 사람이다. 비닐통을 잡고 지지대처럼 서 있으라며 비닐의 끝을 잡고 멀리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은 왠지 아련하기만 했다.
얼마후 또 다른 남편의 병원동기가 왔다. 이분 역시 지팡이에 의존할 만큼 걷기가 불편하다. 감자 심는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재활치료하러 갔다가 한번 더 한다는 심정으로 텃밭에 왔다고 했다. 올 감자심기는 이만저만한 소문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아픈 분들이 제각각 소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니 하지에 잔치 한번 거하게 열어야겠다고 말했다.
여섯 두둑에 비닐을 친 후 남편이 감자씨가 들어갈 구멍을 내면 나는 뒤따라가며 감자를 깊숙이 넣었다. 남편지인은 그 위에 흙무덤을 만들면서 따라왔다. 환상의 콤비라고, 3인 1조가 돼 농가로 알바하면서 일당도 벌자고 농담하던 찰나에 남편지인이 무리했는지 재활이 아니라 병이 재발되게 생겼다고 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감자꽃이 필 때 읊었던 권태응 시인의 시 <감자꽃>을 한번 말해보라는 남편의 주문에도 꼼짝을 안 하니 말솜씨 좋은 남편이 알아서 낭송했다. 하루를 되돌아보는 저녁밤, 감자밭을 만들려고 전쟁을 치룬 듯한 감정이 몰려왔다. 어떤 시로 이 마음을 달래볼까 하다가 안도현시인이 쓴 <감자꽃>을 읽으면서 내 주먹을 바라본다. 이것보다 작아도 좋으니 '감자야 꼭 만나고 싶다'.
흰 꽃잎이 작다고
톡 쏘는 향기가 없다고
얕보지는 마세요
그날이 올 때까지는
땅속에다
꼭꼭 숨겨 둔 게 있다고요
우리한테도
숨겨 둔
주먹이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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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늦었어요" 할 때... 기적처럼 감자를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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