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 공약(公約) 및 서약문(誓約文). 1941년 11월 28일 국무회의에서 차리석(車利錫) 위원이 제출한 것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제정됐다.
독립기념관
'9개준승'을 취소하기 위한 논의도 계속 이어졌다. 1942년 10월 개원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주로 야당(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9개준승'을 받아들인 정부에 대한 책임 추궁이 이뤄졌다. 그러면서 이를 개정 내지는 취소해야 한다는 성토가 쏟아졌다.
재밌는 사실은 추궁을 받는 정부 역시 야당의 이런 주장을 오히려 반갑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당시 외무부장이었던 조소앙(趙素昻)은 "이 의회를 이용해서 광복군을 경정(更正: 바르게 고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라며 야당의 불만을 역이용하여 중국 당국에 '9개준승'의 취소를 요구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이는 여야 할 것 없이 당시 독립운동가들 모두가 우리 군의 통수권만큼은 우리 정부가 갖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임시정부의 '9개준승' 취소 요구에 중국 당국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에 1943년 10월 개원한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중국이 '9개준승' 개정을 거부한다면 임시정부가 일방적으로 폐지를 선포해야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우리의 정신까지도 죽어가지고야 어떻게 독립하겠습니까. 우리가 해외에 나올 때도 9개준승을 받으러 왔습니까. 이 자리에서 죽어도 또 망국노 노릇을 못하겠습니다. (…중략…) 광복군이 근무병 하나도 마음대로 처리 못할 만큼 인사문제의 자유가 없어가지고서야 무슨 일할 자유가 있습니까. 부모처자를 버리고 여기 와서 고생하는 여러분이 이런 꼴을 당하자고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정신만은 살아야겠습니다." - 1943년 11월 15일 문일민(文逸民) 의원의 발언 中
발언 직후인 1943년 12월 1일 문일민 의원은 유림(柳林)·강홍주(姜弘周) 의원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장 앞으로 '9개준승' 폐지와 함께 임시정부가 광복군 통수권을 행사하도록 새 군사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제의안을 제출했다.
꿈쩍도 하지 않던 중국 당국은 임시정부에서 이처럼 강경한 행보를 보이자 당혹감을 느꼈다. 자칫 그동안의 원조마저 무위로 돌아갈까 우려한 중국 측은 전향적인 태도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8월 23일자로 임시정부에 '9개준승'의 취소를 통보해왔다.
임시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광복군 운영에 소요되는 각종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차관 제공을 요구하며 구체적인 액수까지 제시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참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당당한 요구였다.
임시정부의 끈질긴 요구에 1945년 4월 중국 당국은 광복군에 차관 제공을 결정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결기에 중국 당국도 두 손, 두 발을 다 든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