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순의 부인 안동 권씨 묘한계순의 묘 아래 부인 안동 권씨의 묘이다.
김철관
하지만 묘역은 관리가 허술해 잘 단장되지 않았고, 후손들이 잘 관리를 하지 않는 탓인지 허름하고 남루한 묘역에서 세월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경기도 지정문화재 문화재 자료 제102호'로 지정이 돼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한 지자체의 관리도 허술해 보였다.
그럼 '한계순'은 어떤 사람일까. 이곳 설명 표지판에 적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개국공신 한상경의 손자이고 함길도 관찰사인 한혜의 아들이라고 돼 있다. 성종 때 좌승지, 공조판서, 승정대부를 지냈다. 특히 이곳 표지판에는 특이한 이력이 하나 있는데, 남이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 1등이 돼 청평군에 봉해졌다는 말이었다.
남이 옥사는 예종 1년(1468년) 때, 남이와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역모로 처형당한 사건을 말한다. 그가 충무공 남이(南怡, 1441~1468) 등의 옥사를 잘 다스려 청평군에 봉해졌다는 의미였다. 후손들에게 남이 장군으로 잘 알려진 그는 현재 춘천 남이섬에 묘가 있다.
남이는 조선 개국공신이고 영의정을 지난 남재(南在)의 현손이고, 태종의 부마인 의산군 남휘(南暉)의 손자다. 부친 남빈까지는 왕족 대우를 받았고, 세조와는 아주 가까운 외척이기에 조선 전기 명문가 집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스물이 되기 전인 1460년에 문과가 아닌 무과 급제했고, 남이의 장인은 세조 때 일등공신인 권람이었다.
권람은 한명회, 신숙주와 더불어 세조의 측근이었다. 세조 13년(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는 병마도총사에 구성군 이준을, 주요 지휘관에 남이 등을 임명했고, 남이를 역모로 몰았던 서출인 갑사 유자광도 이시애의 난에 참전해 진압에 성공했다. 왕족인 구성군 이준과 남이는 동갑내기였고 이런 공을 인정해 세조는 28세 때 이준은 영의정, 남이는 병조판서에 등용했다.
그해 1468년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등극한다.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한 예종은 남이를 겸사복장으로 좌천했고, 유자광이 숙직을 하며 남이가 '혜성이 출현하자 묵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나타나게 할 징조'라고 했다는 역모 고변에 역적이 됐다. 여기에 더해 여진족 정벌시 남이가 읊었던 '북정가(北征歌)'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의 물은 말에 먹여 없애리)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편안케 하지 못하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여기에서 세 번째 구절인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을, 남아이십미득국(男兒二十未得國)으로 '평(平)을 득(得)'으로 바꾸어, 유자광이 고변한다.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해석되면서 역모로 인해 28세의 나이로 비참한 거혈형에 처해진다. 바로 훈구대신들에게 편승한 유자광의 조작 역모가 그를 죽게 한 것이라고 역사는 평하고 있다.
그래서 양평군 한계순은 남이가 역모로 옥에 가둬 고문을 당할 때와 거혈형으로 죽을 때까지 잘 관리를 했다는 의미로 공신에 오른 것이다. 한계순은 칠삭둥이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시대에 살며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임금 측근에서 활약했던 한명회의 조카이기도 하다. 현재 압구정동의 '압구정'은 한강에 날아다니는 기러기를 본다는 의미로 한명회의 정자에서 유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