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대학가에서는 일제히 교련과 학교의 병영화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일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는 1970년대 초 대학생들을 통제하고자 학원병영화의 일환으로 군사훈련을 강화시켰다. 1971년 1학기부터 정규과목으로 채택된 교련교육을 종래 주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리고 집체교육까지 부과하여, 재학 중 무려 71시간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
교관도 전원 현역으로 교체하는 등 학원병영화를 강화ㆍ가속화시켰다.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한 조처였다. 일반 청장년들에게는 향토예비군으로, 대학생들에게는 교련으로 묶어 통제한 것이다. 이 시기부터 대학가의 핫 이슈는 교련반대에 모아졌다. 박정희는 교련반대 학생시위를 가혹하게 처벌했다. 군대로 징집한 학생도 많았다.
학생들은 교련을 반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동서 화해 무드라는 세계사적 조류와 정면충돌한다.
둘째, 군비 확장에 몰두한다면 민족 자멸만을 초래한다.
셋째, 힘의 대결은 평화적 통일에 대한 무능을 표시하는 것이다.
넷째, 학생까지 무장해야 할 절박한 사태가 아니다.
다섯째, 단계적 특혜로 학생 서로를 분열시킨다.
여섯째, 이중 삼중의 병역의무 부과는 민주주의 원칙에 배치된다.
일곱째, 특혜 아닌 특혜로 학생들을 유혹하려는 것은 전체 학생들을 모독하는 행위다.
여덟째, 학생군사훈련은 실효성이 없음이 드러났다. (주석 5)
주석
4> <민주전선>, 1970년 4월 15일치.
5> <자유의 종>, 제8호, 1971년 3월 5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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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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