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제강 장세욱 대표이사의 사과를 요구하며 시민들이 적은 접착식 메모지 게시판이 분향소 옆에 설치돼 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유족의 거리 투쟁이 시작되다
유족들은 서울에 차린 거리분향소에 이렇게 오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고 후 대구고용노동청 광역중대재해관리과에서 나와 현장조사를 했다. 이후 부검도 있었다.
그런데 원청인 동국제강과 하청업체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았고 배상 협의 제안도 없었다. 8일이 지나서야 김연극 동국제강 공동대표이사인 사장이 장례식장을 방문했다. 그는 회사가 선임한 변호사에게 요구사항을 제시해주면 최선을 다해 해결하겠다고 했다. 김연극씨와 장세욱씨가 공동대표지만 사실상 장세욱씨가 실질적 대표라 할 수 있다. 동국제강의 소유자가 장씨 일가이기도 하고 연봉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공시된 자료에 의하면 작년 장세욱 대표이사의 연봉은 49억 원, 김연극 대표이사의 연봉은 8억 원이다.
4월 4일 원·하청을 모두 대리하는 변호사가 합의안 초안을 가져왔는데 배상만이 아니라 주로 회사 및 임직원 면책 중심으로 쓰여 있었다. 동국제강의 태도에 변화가 없어 본사가 있는 서울로 왔다.
4월 11일 서울 시민사회단체들과 간담회를 했고, 4월 13일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입장문을 전달했다. 4월 18일 유족 대표와 사측 대표가 만났으나 회사는 유족의 요구안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도 없이 "들어보기 위해 나왔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다음날 시민분향소를 차리고 농성을 시작했다. 민주노조가 없는 사업장이라 회사를 압박할 동력이 없는 만큼 시민사회 연대가 중요했다.
노조가 없어도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그렇게 시작한 농성이 두 달이 넘었다. 아침 점심 선전전을 했다. 매주 화요일 점심에는 동국제강 포위의 날 선전전도 하고, 매주 금요일 추모제도 하고, 스님들은 매일 예불을 드리고 개신교에서는 매주 기도회를 했고, 수녀님들과 신부님들이 수시로 와서 가족들을 위로하고 선전전에 참여했다.
근처에 있는 아시아나케이오 해고자들과 세종호텔 정리해고자들의 연대도 큰 힘이 됐다. 농성장을 차릴 때 함께했을 뿐 아니라 문화제 및 농성에도 항상 달려왔다. 본인들의 현안이 큼에도 자기 일처럼 여겼다.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에서 농성장을 책임지며 농성을 뒷받침했다. 멀리 구미에서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올라와 농성장을 지키기도 했다. 산재 사망 사고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다.
매주 30분씩 하는 협상은 '시간끌기'용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자며 6월 2일과 3일 집중교섭을 제안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찍 끝내려 했는지 협의 중간 쉬는 시간에 나간 사측 대표들이 연락도 없다. 소식을 듣고 근처에 있는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달려와 본사 건물 로비에서 연좌 농성을 했다. 일방적인 교섭 중단과 불성실한 교섭 태도에 분노한 것이다.
80일째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는데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결국 밤 11시에 협의를 시작했고 이견을 좁히고 6월 7일 보기로 했다. 그러나 6월 7일 합의한 사과문도,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내용도 합의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 유족들을 농락했다. 다시 싸워야 했다.
마침 6월 9일은 철강업계들이 모여 서로 자축하는 '철의 날' 행사가 포스코센터에서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장세욱 대표이사를 만나겠다고 기자회견도 하고 피케팅도 했다. 기자가 인터뷰하려는데 밀쳐서 항의 성명도 냈다. 그래서일까. 6월 14일 재개된 협의에서 회사는 대부분 안을 받아들였다. 88일 만에 이동우씨의 산재사망에 대해 원청이 책임을 인정하는 사과문에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