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7일 자 경향신문1979년 10월 27일 자 경향신문에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과 함께 계엄포고문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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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힘겹게 옥고를 치루고 있는 동안 정세는 변하고 있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각계 대표급의 재야민주인사들이 〈3ㆍ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자 정부는 정부전복사건으로 몰아 서명자들을 구속하고, 1977년 3월 1일에는 재야에서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했다.
같은 해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탄압사건, 10월 서울대생 집회사건과 연세대생 77연세민주수호투쟁선언, 1978년 2월 동일방직노동자 똥물세례사건, 4월 부산대 자율화 민주투쟁선언과 함평 고구마사건, 5월 민주청년 인권협의회 발족, 6월 광화문연합시위와 전남대교수 〈우리의 교육지표〉사건, 8월 기장청년회전국연합회주최 전국청년교육대회 광화문시위, 10월 민주회복 범시민 궐기대회와 동아투쟁위원회 민주인권일지사건, 11월 경북대생 〈구국선언문〉시위 사건 등 대학ㆍ노동ㆍ민주시민단체 등의 반유신 투쟁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특히 1979년은 한국현대사의 변곡점이 되는 연대였다.
3월 1일
윤보선 등 민주인사들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3월 9일
중앙정보부, 크리스찬아카데미 관계자 등 30여 명 연행
5월 5일
당국, 감자 피해보상 운동에 앞장섰던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청기 분회장 납치
8월 11일
경찰,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여성 노동자 강제해산
9월 8일
법원, 김영삼 등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공화당, 국회에서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 변칙처리
10월 9일
당국, 남민전사건 발표
10월 17일
부마항쟁, 정부는 다음날 0시 부산에 비상계엄령 선포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 살해됨
김지하가 쓴 담시 <오행>의 '금극목(金克木)'의 현실화였을까, 김재규 중정부장에 의해 박정희 18년의 독재가 무너지는 10.26 거사가 일어났다.
시월 이십 몇 일이던가? 그게 바로 10ㆍ26 직후였다. 점심 무렵 구치소 소내 방송에서 웬 낯선 목소리가 웬 낯선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역시 좌선중이었다.
"고 대통령께서……고 박대통령께서……고인께서……."
도대체 저것이 무슨 소리일까?
'고'라니? '고'라니? '고'라니?
'고'가 무슨 뜻일까?
나는 서서히 일어나 문으로 가서 문짝에 바짝 몸을 붙인 채(위에 있는 텔레비전 모니터의 시계(視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짝에 몸을 바짝 붙이는 게 나의 버릇이 되었다) 교도관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소리요?"
교도관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오른손으로 자기 목을 탁 끊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탁!"
또 다시 끊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탁!"
"에엥? 누가?"
교도관은 오른손 엄지를 높이 세웠다.
"엇! 박정희가?"
교도관은 오른손을 얼른 입에 갖다댔다.
"쉬잇!"
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또 물었다.
"누가? 응, 누가 그랬어?"
교도관은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 같았다. 박정희가 죽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도 누군에겐가 시해당한 것이다. (주석 1)
주석
1> <회고록(2)>, 436~4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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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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