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의 <모월모일> 박연준 산문집 책표지 — ▲**박연준의 <모월모일>**박연준 산문집 책표지임명옥

토요일 아침, 도서관에 가서 몇 권의 책을 빌려왔다. 그 중에 시인 박연준이 쓴 산문집 <모월모일>을 먼저 읽었다. 오랜만에 읽는 산문집은 편안했다. 서문에서 작가가 '이 산문집은 평범한 날을 기리며 썼다'라고 밝혔듯이 이 책에는 일상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평범을 사랑하기로 한 작가의 시선 속에서 일상은 특별해지고 있었다.

겨울 고양이로부터 하루치 봄과 여름 비를 거쳐 오래된 가을까지, 네 장의 챕터로 구성된 책에는 49개의 일상이 들어있다. 시인이기도 한 작가의 문장은 공들여 고른 단어들과 리듬감 있는 문장으로 꽉 차 있었다. 작가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숙성 과정을 거쳐 쓴 글이라는 것이 느껴져 안단테로 천천히 읽어갔다.

내 꿈은 순한 노인이 되는 것

쉬이 읽히는 문장들이 단어를 상상하고 상황을 음미하게 만들었다. 반추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외롭고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만나고 개와 고양이, 감자와 옥수수를 만난다. 여행지에 가서 목숨 걸고 구경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작가를 만나고 카페에서 글 쓰고 책 읽고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사람을 만난다.

"여름밤은 익어가기 좋고, 겨울밤은 깊어지기 좋다. 봄밤은 취하기 좋고 가을밤은 오롯해지기 좋다."

본문을 시작하는 이 두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문장이 리듬을 타고 고요한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뙤약볕을 벗어나 이 여름밤에 익어가고 있을 대추와 포도, 고추와 무화과들을 상상했다.

추운 겨울, 이파리를 다 떨구고 매서운 겨울밤을 견디며 댜가올 봄을 위해 점점 더 깊어졌을 벚나무의 뿌리를 떠올렸다. 생명력으로 충만한 봄밤의 벚꽃놀이를 그려보고 적요함 속에서 오롯해지는 가을밤의 충만함도 상상해 보았다.

'모든 인간은 자라서 노인이 된다'라는 제목에서 작가는 스스로에게 어떤 노인이 될 것인가 묻는다. 그리고 "내 꿈은 순한 노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순하다는 것은 까다롭지 않고 고집스럽지 않은 것, 사납지 않고 거칠지 않은 것,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사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수록 자기 생각이 아집이 되고 자기 경험이 세상과 인간을 판단하는 선입견으로 작용하는데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나는 작가의 순한 노인에 대한 꿈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언젠가 노인이 되는데 중년의 나이를 건너가고 있는 나에게 노년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다. 그래서 작가처럼 나도 질문해 본다. "어떤 노인이 될까?"

수영하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이 질문은 요즘 수영장에서 만난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머니의 나이는 86세. 그 나이대에는 수영장 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다니더라도 물 속에서 걷기 운동을 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유형과 배영 영법으로 수영을 한다. 할머니의 자유형은 느리지만 쉬지 않고 몇 바퀴를 돈다. 그다음에는 물속에 몸을 눕히고 배영을 한다. 배영 역시 천천히 쉬지 않고 몇 바퀴를 돈다.

할머니의 수영은 누구보다 느리지만 누구보다 성실하다. 할머니는 자신의 방식대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다른 이의 속도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호흡대로 숨쉬기를 하면서 쉬지 않고 여러 바퀴를 돈다. 나는 할머니의 수영을 지켜보면서 나도 나이가 들면 할머니처럼 수영하는 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할머니가 된 나의 수영은 느리고 팔은 간신히 물을 잡고 발차기는 흉내만 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랜 수영의 경험으로 호흡은 가쁘지 않을 테니 자유형 다섯 바퀴, 배영 다섯 바퀴는 돌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몸은 한 바퀴씩 돌 때마다 힘드니 그만 하자, 라는 유혹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내 손으로 밥 해 먹고 내 발로 걸어 다니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유혹을 이길 것이다. 한 바퀴씩 돌 때마다 늙은 몸에게 수영은 도전일 것이다. 그래서 도전을 마칠 때마다 셀프 칭찬을 해 줄 것이다. '잘했어, 오늘도 잘 움직이며 살아가겠구나....'

걷기 운동하는 레인으로 건너와 물속을 걸을 것이다. 물속을 산책하며 물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얼굴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이야기도 나눌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느리게 반찬을 만들고 천천히 밥을 지어 먹을 것이다. 소박한 식사를 마치면 책을 읽거나 글쓰기를 할 것이다. 거기다 커피나 허브차를 곁들이면 금상첨화겠다. 독서는 나에게 사람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게 하는 통로이고 글쓰기는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므로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노인을 꿈꾼다.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고 수영을 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다. 그러나 오래된 이들에게 평범한 일상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나는 노인이 되어서도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꿈꾼다. 평범하게 노력하고 세상에 대한 소박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살기를 꿈꾼다. 그래서 늙으면서도 자라남이 멈추지 않기를 꿈꾼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의 개인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