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소년소녀가극 성황1924년 1월 언양소년소녀가극은 극작가 신고송의 첫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훗날 카프문학운동의 계기는 언양의 소년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조선일보, 1924.01.11.)
조선일보
1923년 10월 언양소년회가 창립할 당시에 언양불교소년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창립 5주년 행사를 1928년 10월 10일 언양청년동맹회관에서 개최하고 천여 명의 청관객이 있는 가운데 가극대회를 하였다. 창립 6주년 행사를 1929년 10월 18일 언양청년동맹회관에서 기념가극회를 개최하고 소년소녀의 유희와 합창, 독창이 있은 후 「어떠한 제복의 인정(人情)」 극을 하는 중 언양주재소 임석 경관에 의해 중지 해산을 당했다.
그런데 『불교』 잡지에는 1926년 9월 9일 언양포교당(현 화장사)에 있는 언양불교소녀단이 언양청년회관에서 창립 2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1929년 4월 11일 언양불교소년단의 주최로 언양청년동맹회관에서 언양불교소년단 창립 6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것을 보면 언양불교소년단은 1923년 4월에, 언양불교소녀단은 1924년 9월에 창립하였다. 당시 언론기관이 소년단과 소녀단을 구분이 헛갈렸거나, 소년단에 소녀회원이 있어 소년단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1923년 12월 27일 조선일보 언양 지국이 생겼다. 당시 신문 축하 광고에 등장한 언양지역 인물과 단체를 보면 당시 언양지역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언양 동부리 김홍경과 배인찬(해방 후 농지개혁을 한 배기철의 부친), 남부리 약종상 정택하(정인섭의 부친), 상남면 양등리 김석한ㆍ김영한 형제, 등억리 김찬희, 하북면 지내리 성충갑 등 지역 부호의 이름이 있다.
상남면 거리의 사립양정강습회, 두서면 구량리 보신강습소(소장 김원집, 교사 장근덕 김차곤)와 보신강습소 우리학우회, 삼동면 금곡리 낙영의숙, 화잠리 둔기의숙, 둔기리 진명강습회, 중남면 노동야학회연합회, 중남소년학우회, 중남수리조합창립사무소, 농촌공조회, 언양소년단, 언양청년회, 천도교울산군교회, 언양공보, 두동공보 등이 축하 광고를 하였다.
언양 지역 소년단체들의 활동은 당시 조선일보 언양지국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소년운동과 청년운동 보도가 많았다. 언양만세운동 주축자로 구성된 '사시회(四時會)'가 1925년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조선일보 언양지국을 운영했다. 이규장은 경영을, 김기오가 총무를 할 때 어린 오영수는 신문배달을 하였다.
신고송의 언양 소년가극 운동
1923년 10월에 창립한 언양소년단은 1923년 11월 소년단의 취지와 필요를 선전하기 위하여 17일 추계대운동회를 하고 24일 소년소녀가극 공연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운동회에 몰려들어 가극을 다음 해로 연기했다. 1924년 1월 첫주에 있었던 일을 신고송은 『어린이』 1924년 1월호에 「밧브든 일주일간」을 발표했다.
신고송은 1월 1일(월) 가극회 연습을 생각하며, 이렇게 노력하면 언양소년단도 영영 발전하겠다고 생각했다. 2일(화) 무대에 사용할 소나무를 구하고, 무대를 꾸몄다. 3일(수) 정오 가극회 단원이 모여 시내에 광고를 돌렸다. 밤에 동화 암송과 극 「밥 강엿」과 「쌀기와 금깡자」 그리고 소화(笑話, 우스운 이야기)를 책임있게 하였다. 4일(목)에는 해가 질 때까지 연습을 하고, 동화 암송과 극 「홍그래비[방아깨비]와 지렁이」, 희극 「흑」의 여러 가지를 하였다.
가극을 마친 뒤 만세를 세 번 부르고 역자와 위원의 위로회가 있었다. 이번 계획의 성공에 기뻐했다. 6일(토)은 지난 닷새동안의 피로를 풀기 위해 종일 쉬었다. 7일(일) 저녁 아홉시에 청수를 모시고 조선 소년, 우리 언양 소년의 전도를 위해 기도하였다. 청수를 모시고 기도함은 전통적 또는 천도교적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924년 1월 3일과 4일 양일 오후 8시에 언양소년단 일동과 소녀학생 10여 명이 가극회(歌劇會)를 조직하여 언양공립보통학교에서 성황리에 소녀소녀가극회를 하였다. 설립된 지 3개월도 지나지 못함에 따라 사회적 사업으로는 이번이 처음으로 일반의 열혈적 환영은 참으로 상상 이외의 성황을 이루었으며, 소년단 간부들의 많은 노력으로 소년단의 취지를 철저히 선전한 바 일반 관중들은 소년단의 필요함을 감각하여 동정금이 1백여 원에 달하였다.
소년단은 동정금으로 이번 가극의 비용을 제하고 남은 돈으로 단원들이 열망하는 운동기구와 기타 필요품을 설비할 예정이다. 가극회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의 문화 계몽적 역할을 톡톡히 하고, 소년회의 취지를 알리고 재정확충의 계기가 되었다. 이 가극회의 성공에는 신고송의 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신고송의 입장에서 이 당시의 경험이 훗날 극작가의 길로 걷게 한 계기가 된 듯하다.
1924년 5월 1일 언양소년회를 창립 이후 첫 어린이날 행사가 있었다. 이날은 세계적으로 조선적으로 기념할 날이었다. 노동자와 어린이를 사람답게 다 같이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자는 메이데이와 어린이날이 두 번째로 동시에 전국적으로 열렸다. 하지만 경성지역은 노동집회와 어린이 행렬이 일체금지되었다.
천도교당에서 소년운동협회 주최의 어린이날 축하회에 남녀소년 수천 명이 모여 성대한 행사를 하였다. 신문에서는 "새조선의 싹을 위하여 어린아이에게 새 옷을 입히고 이 명절을 즐겁게 지내자"고 하고, 1일은 어린이 날을, 2일은 어머니 대회, 3일은 어버지 대회를, 4일은 공휴일이라 동대문 밖 상춘원 넓은 동산에서 어린이 대원유회를 연다고 보도하였다.
소년운동협회는 130여 전국 소년단체에게 30만 장의 선전서를 배포하였다. 경성과 달리 지방에서는 어린이날 시위행렬이 있었다. 5월 1일 언양 각 소년단체가 모여 어린이날 기념행사에 소년단장 김기오의 연설이 있은 후, 오후 1시에 시위행렬을 시작하여 언양 시내를 한 바퀴 돈 후 3시에 유감없이 해산하였다. 그런데 울산지역의 어린이날 행사는 보도가 없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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