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산에서 포로로 잡힌 주민들이 집단학살되어 불에 태워진 용천사 입구
박만순
광주시(현 광주광역시)를 출발한 버스가 '쿨렁쿨렁'하며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버스가 밀재를 넘어 전남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 다리를 지나갈 때였다. '타타탕' '끽' 버스가 급정거하자 버스에 타고 있던 경찰들이 응사했다. 빨치산의 공격이었다.
경찰 여섯 명, 임산부 한 명 목숨 잃어
매복한 빨치산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는 경찰들의 응사는 별반 효과가 없었다. 반면 엄폐물을 이용한 빨치산의 조준사격은 얼마 안 되어 경찰 6명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나마 경찰 한 명은 달아나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버스에 타고 있던 임산부 한 명도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전남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1949년 가을에 일어났다.
빨치산은 왜 경찰을 공격했을까. 1948년 여순사건 이후 불갑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에게 1949년 예기치 않은 장애물이 생겼다. 영광경찰서가 불갑산에서 태청산으로 가는 길목인 밀재에 불갑산 빨치산의 발목을 잡기 위해 출장소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밀재출장소에 주둔한 경찰은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 삼산마을 앞 묘량초등학교 분교로 매일 출근했다. 인근에 사는 17~45세 여성들에게 죽창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차에 밀재출장소 경찰들이 매일 오전 9시~10시 사이에 광주에서 버스로 온다는 정보를 접해 공격한 것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영광경찰서 기동대와 밀재출장소 경찰들이 급파됐지만 빨치산은 불갑산으로 종적을 감춘 뒤였다. 이후 불갑산 수색에 나선 경찰들은 굴 하나를 맞딱뜨렸다. 경찰들은 잔뜩 긴장해 조심스럽게 굴 안으로 진입했다. '쾅 깽'하는 돌 깨는 소리가 들렸다. 한 영감이 숫돌을 깨고 있었다.
닭 잡아 내놓으라는 경찰
"영감 이리 나왓!" 기다시피 굴 밖으로 나온 노인 김용채에게 경찰은 다짜고짜 빨치산 협력자 취급을 했다. "산사람들 어디로 갔어?" "...." "이 새×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감히 묵비권을 행사해"라며 손과 발로 사정없이 때렸다. 하지만 산 사람이라고는 구경도 못한 김용채는 경찰들에게 할 말은 없었다.
"이 영감쟁이는 빨갱이가 틀림없어"라며 김용채에게 수건을 뒤집어씌운 후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잠깐만요. 저 사람은 그럴 이가 아니요"라고 한 이는 밀재출장소 주임이었다. 평소 밀재출장소 보수공사에 동원이 되었던 김용채를 알아본 주임이 그를 적극 두둔했다. 그러헤 해서 김용채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김용채 가족은 경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일이 있기 몇 달 전에는 그의 동생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묘량면 삼학리 신성마을에 살던 그는 자기 논에 물꼬를 보러 가다가 영광경찰서 보안과장 지프차에 치여, 허벅다리 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보상은 일절 없었다. 또 김용채의 장남 김광길은 일제강점기 말에 "김일성 장군이 축지법을 쓴다"라는 말을 했다가 '유언비어 유포죄'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평양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김광길이 조직적인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김광길 집안은 자연스레 일본제국주의에 증오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서 속에 여순사건 이후 불갑산에 진지를 구축한 빨치산의 존재는 삼학리 주민들과 군경의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동포에게 총구를 들이댈 수 없다'며 제주도 출정을 거부한 여수 14연대와 이에 호응한 시민들 일부가 무장대를 꾸려 불갑산에 입산한 것이다. 빨치산과 삼학리 신성마을 주민과의 관계는 끈끈했다. 1949년 겨울 빨치산들은 주민들에게 '김일성 장군의 노래' 등을 가르쳤고, 사격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한국전쟁 전 불갑산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국군 20연대가 묘량국민학교에 주둔했다. 매일 토벌작전을 벌이는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군수품은 형편없었다. 그러자 주민들에게 "밥해 놔라, 닭 잡아라, 돼지 잡아라"며 강제적인 할당이 떨어졌다. 삼시세끼 해결하기도 어려운 농민들에게 군인들의 요구는 피 말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군경을 경원시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 세상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인민이 주인 되는 사회를 만들자." 교단에 선 이의 선창에 묘량국민학교에 모인 이들은 팔을 힘차게 내저으며 복창했다. 소년단장 김영승(1935년생)을 포함해 삼학리 소년들도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은 급속히 남하했다. 1950년 7월 23일 광주와 영광·함평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약 15가구가 살던 삼학리 신성마을에서는 김용채 집안이 인민위원회와 유관 기관의 주요 감투를 썼다. 김용채의 장남 김광길은 삼학리 민청위원장, 둘째 며느리 정영애는 삼학리 여맹위원장, 작은딸 김영미(가명)는 묘량면 선전부장, 막내아들 김영승이 삼학리 소년단장을 맡았다.
선거를 통해 소년단장에 선출된 김영승은 소년 20명을 모아 목총으로 군사훈련을 했다. 소년들을 임의로 빨치산, 인민군, 국군 3개 조로 편성해 모의 전투를 벌였다. 민청(민주청년연맹)의 지도 아래 각종 궐기대회도 했다. 당시 주민들 대부분이 까막눈이라 소년 김영승은 노동당 삼학리세포 간사를 맡아 문서 작성을 도왔다. 또한 당비 징수 역할도 맡았고, 면에서 내려오는 지시사항을 삼학리 자연마을에 전달하는 연락원도 했다. 묘량면에서 이루어진 의용군 모집사업에 김용채의 차남 김영식이 제1기로 자원했다.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그는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인민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꿨던 인민공화국 세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2개월여 인공세상을 뒤로 하고 소년 김영승 가족은 1950년 10월 6일경 태청산으로 입산했다. 신성마을 주민들 대부분도 입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UN군이 수복하면 모두 죽는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청산에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소나무와 수풀만 있는 산이라 유격투쟁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해 11월에 김영승 가족을 포함한 묘량면당부 주민들(묘량면 노동당에 속해 있거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불갑산으로 이동했다.
불갑산은 시장통... 무장한 사람은 소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