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속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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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의 상담 도중 이따금 자문할 때가 있다. 지금 내가 교실에서 만나고 있는 고등학생 중에 졸업한 뒤 경제적으로 자립해 살아갈 수 있는 경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누구나 대학 진학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등록금에 대해 걱정하는 아이를 지금껏 본 적이 없어서다.
나이 스물을 앞둔 고등학생 정도면, 흔히 '천문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등록금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할 법도 하다. 하지만 대학 진학 외엔 고민조차 사치라며 오로지 입시 공부에만 매달린다. 그들은 등록금이 부모의 몫이라 여긴다. 부모 역시 자녀 앞에서 "명문대만 합격한다면, 머리카락을 팔아서라도 보낼 것"이라고 선선히 말한다.
하긴 방과 후 수업을 받을지 말지,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할지 말지, 심지어 몸이 아파 조퇴할지 말지조차 부모에게 일일이 허락받는 요즘 아이들에게 등록금 걱정은 언감생심일 테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건 공부 외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다. 아무리 대입이 전쟁터라지만, '공부만 하면 되는' 아이들이 부럽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초중고의 모든 교육과정이 대입으로 수렴되는 현실이 과연 정상이냐는 성찰적 질문은 우리 사회에선 어느덧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돼버렸다. 대입이 교육의 '종착역'이 된 지금, 대학은 더는 '큰 배움'을 위한 곳이 아니다. 대학이라는 '기업'에 충직한 '고객'이 되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은 불철주야 책과 씨름하고 있다.
관심은 잠깐일 뿐이었다
지난 21일 보육원 출신의 한 새내기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가 종일 포털 사이트에 걸려 있었다. 안타깝고, 미안하고, 참담한 마음에 일이 종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의 방에서 발견된 쪽지 속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이 많은데'라는 글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경찰은 타살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며 내사 종결할 뜻을 밝혔다.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을 원인으로 지목한 언론에서는 이구동성 경제적 취약 계층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질타했다. 원인 분석부터 제시하는 대책까지 너무나 뻔한 레퍼토리라 이젠 눈길조차 가지 않는다.
과거 '송파 세모녀 사건' 때도, 영화 <기생충>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때도 반짝 언론의 관심을 끌었을 뿐 변한 건 없었다. 최근 반지하에 살던 가족이 폭우에 숨지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지만, 늘 그래왔듯 부박한 여론은 망각을 부추길 것이다. 경제적 취약 계층은 그들의 목소리를 정책으로 반영시킬 만한 힘이 없는 '연민'의 대상일 뿐이어서다.
교사라서일까. 모든 언론은 '보육원 출신'이라는 데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난 '새내기 대학생'이라는 단어가 더 가슴을 아리게 했다. 달랑 자립 지원금 700만 원을 손에 쥔 채 보육원을 내쫓기듯 나가야 했던 그의 심정을 몰라서가 아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정부의 정책적 배려와 경제적인 지원이 조금 더 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야 왜 없겠는가.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그의 대학 생활은 불과 반년만에 끝났다. 책도 읽고 싶고, 친구도 사귀고 싶고, 남들처럼 여행도 다니고 싶었을 텐데, 그의 청춘은 채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스러졌다. 아직 제 삶을 책임질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그에게 대학은 '캠퍼스의 낭만'은커녕 하루하루 버텨내야 하는 생존 투쟁의 현장이었던 거다.
과연 그에게 대학은 무엇이고, 학창 시절 10여 년 동안의 배움은 어떤 의미였을까. '보육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그 근본적인 질문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배움은 삶을 위한 수업'이라는데, 제 삶 하나 건사하지 못하도록 방치한 우리 교육의 무책임과 무능을 반성하는 게 먼저 아닐까.
묻는다, 학교는 제역할을 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