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하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고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이희훈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이야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4월 세상을 뜬 채현국(1935~2021) 선생이 생전에 했던 말이다. 본인이 팔순이면서도 덜 떨어진 '꼰대' 노인들의 시대착오를 거침없이 비판했던 늙은 청년 채현국 선생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번에 책을 냈다.
황명걸 시인을 비롯한 37명의 인사들이 참여해 <건달 할배 채현국과 친구들>(도서출판 피플파워)을 묶어 낸 것이다. 말년에 세상 흐름을 거스르는 철부지 노인들을 향한 '촌철살인'으로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한 몸에 받았던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글들이 많다.
황명걸 시인은 서울 '인사동 시절'을 떠올리며 고인에 대해 "부친의 광산개발로 뒤늦게 부자가 된 그는 혼자만의 부(富)는 값어치가 없다고 여겨 어려운 친구들을 도우니,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친구가 없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채현국 선생의 선친은 강원도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했고 한때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2위에 오를 정도로 거부가 되었다. 채현국 선생은 박정희 유신정권 때인 1970년대 초 사업을 접으면서 미련 없이 모든 재산을 처분해 동업하던 친구들과 광부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화운동을 지원했고, 정권에 쫓기는 이들을 숨겨주고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과 함께 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을 지원하고, 문인과 예술가들을 조건 없이 도왔으며, 셋방살이하던 해직기자에게 집을 사준 일은 한참 뒤에 알려진 일화다.
서울대를 나온 고인은 양산 웅상에 효암고교와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으로 있었고, 1989년 전국교직원노조가 결성되자 정부에서 가입 교사들을 해직하라고 했지만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았다. 학교 이사장이었던 선생은 교사 채용 때 발전후원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추천해 준 사람한테 좋은 인재를 소개해 주어 고맙다며 밥을 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일반분야에서 민주화 등 공익을 위해 활동한 이들 가운데 적어도 1000명 이상은 선생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 분은 세상의 스승이셨다"
이 책에서 여러 인사들이 '시대의 어른'이었던 채현국 선생을 떠올렸다. '여성동학다큐소설 출판기념회'를 추억한 고은광순 평화어머니회 상임대표는 "채현국 선생님은 축사를 하시기에 앞서 갑자기 무대 위에 앉은 우리 작가들에게 큰절을 하셨다. 우리도 황망히 일어나 맞절을 드렸다. 상명하복. 위계질서 깨기. 권위주의 파괴는 나도 주장해온 바이지만, 채현국 선생님의 '급습'은 과연 선생님다운 것이었다. 백 마디의 축사와 격려사가 이 보다 더 가슴을 파고 들 수 있으랴"라고 했다.
김운성 조각가는 "그 분은 세상의 스승이셨다"며 "우리 조각가 부부에게 이야기 했던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평화의소녀상을 부산항 부둣가에 세워야겠다는 것었다"며 "그 장소가 여인들 끌고 가는 마지막 장소라고 하셨는데,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1년 흥국탄광에서 3주간 일했다고 한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어느 벗을 통해 소개 받아, 물어물어 찾아가 노무과에 이력서를 내고 다음날부터 일했다. 갱에는 못 들어가고 석탄을 화물차에 싣는 일, 잡석을 인공비탈 아래로 떨어뜨리는 일을 했다. 월급날도 되지 않았는데 사무실로 누군가 불러 월급을 주면서, 내일부터는 나오지 말라고 했다. 그때 탄가루 투성이인 작업복 한 벌을 보따리에 넣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며 "아, 그 때 탄광의 경영자가 채현국 선생님이셨구나"라고 회고했다.
<창작과 비평>을 언급한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그때 채 선생한테 받은 후원금과 필자들에게 지급한 원고료 액수를 또박또박 적어놓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몇 천만원이 될지 모르는데, 돈의 액수도 액수지만 그보다 나름의 역사적 기록이 될 터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하지만 때로는 그런 기록이 유죄의 증거로 악용되던 시대도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임락경 목사는 '스승의 은혜'라는 글에서 "그 당시 광업소에 있었던 사람들 똑같이 나누어주었어. 가령 지배인들은 많이 주고 일용 노동자는 쬐끔 준 게 아니고 같이 나누어 주었고, 갈 데 없는 이들은 함께 살도록 공동협동 농장을 만들어서 정착하도록 했다"라고 밝혔다.
백낙청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은 "그가 하는 말에 내가 전부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는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내가 볼 때 완전히 확실치 않은 것을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단정적 발언들이 통쾌할 적이 더 많았으므로 나는 굳이 이견을 내고 다투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서승 우석대 동아시아연구소장은 선생에 대해 '우리 사회의 큰 건달'이라고 표현했다. 지리산 종주를 함께 했던 남난희 산악인은 "생전에 지리산 종주를 하실 수 있게 해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책에는 구중관, 김낙영, 김보경, 김승환, 김주완, 김철환, 노광래, 박구경, 박상희, 박영현, 방영웅, 배평모, 복기대, 신경림, 이기흥, 이만주, 이상만, 이용학, 이종찬, 이진영, 임계재, 전동적, 정명숙, 정상학, 최규일, 최정인, 최혁배, 허태수씨 글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