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청년회 1주년 기념 총회 병영청년들은 사립일신학교와 학성공보 출신으로 일제 식민지기 사회운동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병영초등학교
병영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병영출신들은 기미계(己未契)를 조직하여 유대를 강화했다. 만세운동 출옥자들이 1924년 가을 '부흥총회' 이후 병영청년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4월 병영청년회는 울산청년 단체 대표자 간담회에 참석하였고 4월 24일 '혁신총회'를 통해 일진월보(日進月步)하게 되었으며 4월 29일 병영청년회관을 신축하기로 결정하였다.
1926년 4월 27일 청년회관 낙성 이후 무산청년 백여 명에게 야학 공부를, 일반회원에게는 사회과학지식 보급을 하여 투쟁의 역군을 양성하기 위해 팜플렛과 과학 서적 구입 등을 통해 시대사조에 따르는 청년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병영청년회는 5월 8일 혁신총회를 통해 사회진화의 법칙에 의하여 대중 본위인 사회건설의 역군 훈련과 양성을 목표로 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문화주의적 청년운동에서 사회주의 경향으로의 변화를 도모한 1926년 5월의 병영청년회의 혁신총회는 병영 소년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병영 소년단의 활동
1925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환희에 뛰놀고 기쁨에 춤추는 울산병영 학성공립보통학교 1백여 명의 학생들은 김영진 선생님의 인솔하에 붉은 글자로 "어린이날"이란 기를 휘두르고 어린이 기념 창가를 높이 부르면서 시내 시외를 행렬하여 기념의 뜻을 다하였다. 이날 수많은 관중으로 하여금 갚은 인상을 주었다.
1925년 12월 31일 병영소년회에서는 병영예배당에서 소년소녀현상동요동화대회를 열었다. 60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동화는 1등 노덕출, 2등 박영호, 3등 이성금(여), 4등 김중삼, 5등 문형목이 받았고 동요는 1등 김갑수, 2등 이이호, 3등 윤장석, 4등 최말연(여), 5등 윤기석이 받았다.
1926년 1월 6일 오후 7시 병영소년회는 병영청년회관에서 병영지역 소년소녀를 초대하여 신년 다과회 및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약 700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즉석에서 병영소녀회 발기를 하여 회원 30여 명을 모집하였다. 주요 회원은 정입문, 이덕만, 이말선, 최두연이었다.
1926년 3월 21일 오후 9시 울산군청년연맹 주최의 남선웅변대회가 병영청년회관에서 있었다. 울산군청년연맹은 13개 단체로 구성되었는데, 울산성우회ㆍ오일회ㆍ동면구락부ㆍ강동노동청년회ㆍ대현청년회ㆍ언양청년회ㆍ중남청년회 등이다. 관중은 5, 6백 명이 넘었다. 울산군청년연맹 검사위원 오의상의 사회로 10여 명 연사의 웅변이 있었다. 웅변 중간 중간에 강군숙, 정립분, 최형식의 독창이 있었다.
연사와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신계난 "식민지 인사의 사(死)를 조(弔)함", 조형진 "당면문제", 성세빈 "신생의 의의", 강철 "미래의 승리", 박홍식 "물질문명의 반면(反面)", 김상률 "교문을 나서는 무산소년아", 이종수 "무엇보담 단결력", 유창식 "청년 동모(同侔)에게", 권우락 "인류생활은 무엇", 박문한 "청년운동의 본무(本務)", 이규경 "우리의 생명은 언제까지 지속할가".
연사들은 울산 청년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특히 성세빈의 웅변의 다수 청중이 열광하였다. 청중 속에는 병영에 사는 소년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연사들의 내용에 호응하며 박수를 보냈다.
1926년 8월 13일 밤 병영청년회의 후원으로 소년소녀동화동요대회를 열었다. 심사위원은 조선교육협회 이사 신명균과 경성중동학교 교수 정렬모가 조선어강습회를 계기로 울산에 채류하여 하기로 하였다. 동화부는 심사를 신명균이 하였다. 1등 조〇우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 2등 최경식 "불쌍한 소년소녀", 3등 박현희 "지혜 많은 괴인"이 수상하였다. 동요부는 심사를 정렬권이 하고, 1등 이규섭 "잠아", 2등 김화 "우리집", 3등 윤기석 "바람아 불어라", 4등 이종기 "불고기"가 선정되었다.
병영청년회에서는 문맹 아동을 위한 노동야학을 개시하여 운영하였으나 재정 곤란과 교사가 없으므로 많은 난관 속에 폐쇄의 비운을 맞았다. 1926년 봄 이래로 병영청년회 신축회관에 야학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는데, 병영소년회 간부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현재 100여 명의 무산아동이 교육을 받고 있다.
1927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병영의 소년·소녀 180여 명은 3, 4일 전부터 기 행렬을 준비하였다. 경찰의 근신 중이니 행렬을 하지 말라는 만류로 인하여 부득이 시내 행렬은 중지하고 당일 오전 8시부터 병영청년회관에 집합하여 2천여 장의 선전 전단을 시내 각 집마다 산포하였다. 10시에 어린이날 식을 거행한 후 야외산보와 유희 등으로 즐겁게 뛰고 기념하였다. 오후 8시부터 청년회관에서 가극 등의 재미스럽고 의미 깊은 여흥을 하였다.
1928년 5월 어린이날은 울산 각 소년회 연합으로 성대히 거행하였다. 오후 1시부터 울산청년회관에서 주악을 하는 가운데 기념식을 순서대로 거행한 후 2시 30분부터 기(旗) 행렬을 거행하였다. 병영과 읍내를 한바퀴돌고 밤에는 울산불교포교당에서 부모화를 열었다.
축구대회를 개최한 학성소년회, 범학소년회(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