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의 시비 <기우는 해>신석정의 첫 번째 시 <기우는 해> 만 18살에 썼다고 한다
박향숙
한시로서 받은 여류시인 중 이매창의 작품이 몇 편 있다. 고향섬 식도를 가려면 반드시 부안군을 거쳐야 하는데, 부안에 있는 매창공원이 바로 이매창 묘비와 시비가 있는 곳이다. 몇 년 전에도 우연히 가본 적 있었지만 단 한 글자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글자는 한자요, 이매창은 기녀인가 보다 정도로 지나쳐 왔는데, 이렇게 내 발로 직접 찾아갈 줄이야. 참으로 묘한 것이 인생이고 인연이다.
부안으로 가기 전 이매창과 연결되는 또 한 분의 명인 신석정 시인(1907.7.7. ~ 1974.7.6.)을 대변하는 신석정문학관도 여행 목록에 넣었다. 군산의 대표 문인으로 <탁류>의 채만식 작가가 있다면, 부안에는 <기우는 해> <임께서 부르시면>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쓴 시인 신석정이 있다. 문학관에 들어서니 왠지 프랑스의 유명배우 알랭드롱을 연상시키는 시인의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기우는 해 – 신석정
해는 기울고요 ㅡ
울던 물새는 잠자코 있습니다.
탁탁 툭툭 흰 언덕에 가벼이
부딪치는
푸른 물결도 잔잔합니다.
해는 기울고요 ㅡ
끝없는 바닷가에
해는 기울어집니다.
오! 내가 美術家였드면
기우는 저 해를 어여쁘게 그릴 것을. (중략)
그는 전북 부안 태생으로, 1931년 김영랑‧박용철‧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제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등단하였다. 1939년 첫 번째 시집 <촛불>을 통해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두 번째 시집인 <슬픈 목가>(1947년)에서는 현실 참여시인으로, 마지막 시집인 <대바람 소리>(1970)에서는 다시 서정시의 세계로 복귀했다는 글을 읽었다.
문학관의 벽면에 써 있는 그의 좌우명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높고 의연한 산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에 뜻이 있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노장사상철학과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의 자연주의 시인 소로우(Thoreau)를 좋아했다 한다. 반속적(反俗的)이며 전원과 자연에 바탕으로 한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신석정은 조선시대 시인 이매창(1573-1610)의 한시를 그의 현대적 감각과 음률로서 '매창시집'을 발간했는데 이는 내가 이매창의 한시를 대하는 데 연결고리가 되었다. 300여 년의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걸었을 두 시인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내 한 걸음 한 걸음에 거룩함마저 느껴질 정도였으니 얼마나 소중한 여행인가. 이 감동을 나 혼자만 느끼고 싶다면 과한 욕심이던가.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매창의 시, 이화우 흩뿌릴제)
이매창은 조선 선조 6년, 전북 부안현에서 태어나 노래와 거문고에 능했고, 특히 시조와 한시를 잘 지었다고 한다. 위 시는 그녀 나이 20살 무렵,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1545~1636)을 만나 평생의 연인이 되고 시로서 대화를 나눈 사랑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