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 EPA=연합뉴스) 18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 거리에 고(故) 마흐사 아미니(향년 22세) 씨가 경찰에 구금됐다가 의문사한 사건을 보도하는 일간지가 놓여있다. 지난 13일 히잡을 쓰지 않은 혐의로 풍속 단속경찰에 구금된 고인은 조사 도중 돌연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16일 사망했다. 지난 17일 고인의 고향인 쿠르디스탄주 사케즈에서는 고인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EPA/연합뉴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이란에서 22세의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 착용 문제로 '도덕 경찰'에게 체포되어 사망한 것이 지난달 13일의 일이었다. 이란 정부 측은 아미니의 사망이 기저질환으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주장했지만, 유가족은 아미니에게 다른 질환이 없었다며 경찰의 폭행으로 인한 사망임을 주장했다.
아미니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란 전국에서 시위가 일었다. 시작은 아미니에 대한 추모였고 악명 높은 이란 내 경찰폭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하지만 한달 새 전선은 넓어졌다. 시위는 이란의 성차별 정책과 이슬람에 기반한 신정(神政) 체제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여성들은 거리에서 히잡을 불태우며 하메네이 정권을 규탄했다.
시위가 전국 단위로 확대되며 이란 정부는 시위대를 강력하게 진압했다. 이란에는 이미 경험이 있었다. 2009년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재선을 촉매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 36명이 사망했다. 2017년에도 시위가 있었고, 2019년에는 '이란 정치위기'로까지 불리는 전국적 시위가 있었다. 2019년 정치위기 당시에는 사망자 추산치가 최대 100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란 정부는 그간의 시위를 인터넷 차단과 폭력적 진압으로 대응했다. 많은 상처가 남았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하메네이를 일극으로 하는 독재적 권력체제도 해체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란의 시민들은 다시 한 번 사회통제와 정치체제를 겨냥해 일어났다. 한 달 넘게 이어지는 정부의 강경한 진압에도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힘의 이면에는, 이란인 디아스포라가 굳건한 바탕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란인 디아스포라
이란인 디아스포라의 본격적인 역사는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 혁명으로 호메이니 정권이 성립하면서 이란 사회는 급속하게 보수화됐다.
이번 시위의 계기였던 히잡 착용 문제만 봐도 그렇다. 이슬람 혁명 직후 여성의 히잡 착용이 의무화됐다. 1983년에는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착용하지 않으면 채찍형을 내리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1995년에는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60일까지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2005년에는 '도덕 경찰'이 만들어져 히잡 미착용을 비롯한 이슬람 율법 위배를 단속하도록 했다.
통제적이고 차별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 많은 이란인들이 이주를 택했다. 이란 정부에서는 약 4백만 명의 이란인이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이란의 인구는 8천만 명 수준이니, 전체 인구의 5% 가량이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미국, 캐나다, 영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슬람 혁명 이후 4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이란인의 해외 이주는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청년과 고학력자를 중심으로 한 이주는 이란의 사회문제로까지 언급되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Pooya Azadi, 2020)에서는 이란의 총 연구인력 중 3분의 1이 외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이 같은 이주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란의 통제적인 사회정책, 독재적인 정치, 부패와 성장 정체로 인한 기회 박탈,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한 가능성의 상실이 이주를 촉진하고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이란인들은 점차 이란 사회와 유리되고 있고, 이란으로의 귀국 경향도 뚜렷하게 줄어들고 있다.
물론 이주하지 않은, 혹은 이주하지 못한 이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사회 현실에 만족하고 있을 리 없다. 이들은 이란 내에서 2009년, 2019년, 올해까지 이어진 정치적 격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가 이미 그 사회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이주한 디아스포라 집단에게까지 닿으며,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역할
이번 시위의 계기가 된 마흐사 아미니의 사망 소식은 이란의 언론 <샤르그>와 그 소속 기자 닐루파 하메디의 취재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그러나 하메디를 포함해 이란 주요 언론의 기자 상당수는 이미 체포된 상태다. 이란 내에서 집회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공식적인 창구는 없다시피 하다.
그 빈틈을 메워준 것이 이란인 디아스포라였다. 이란 정부는 인터넷 차단과 미디어 검열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현재도 이란 내의 인터넷 연결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다.
2019년 시위 당시 이란 정부는 6일 동안 이란 내 인터넷 접속을 차단했고, 이 시기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수백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국내와 국외를 가리지 않고 이란인들은 그 사건을 잊지 않았다.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란인 디아스포라 집단은 현지의 이란인들에게 이란 당국의 검열을 회피할 수 있도록 VPN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란의 시위 참여자들은 이를 통해 직접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외부로 송출하고 있다.
영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란인 디아스포라 방송국인 <이란 인터내셔널(Iran International)> 등 페르시아어 언론사들은 이렇게 받은 제보를 기반으로 현지 상황을 재구성하고 보도했다. 이란 현지의 시민들은 다시 VPN을 통해 이 보도를 받아보면서 시위 상황을 확인했다.
왓츠앱(WhatsApp) 등의 메신저나 소셜 미디어가 당국에 의해 차단된 상태에서 VPN과 디아스포라 미디어는 시위 확산과 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외국의 인권단체와 UN 등의 국제기구에 이란의 상황을 알리는 데에도 이란 정부의 인터넷 검열을 회피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 시민들의 역할은 주효했다.
세계 각지에서 이란 정부를 규탄하는 디아스포라 집단의 시위와 행진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10월 1일에는 전 세계 각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인 집회가 있었다. 미국에서는 뉴욕과 워싱턴,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집회가 펼쳐졌다. 토론토에서는 5만여 명이 시민들이 운집했다. 런던과 파리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었다. VoA에 따르면 탈레반의 지배 하에 놓인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도 30여 명의 여성들이 모여 이란 정부를 규탄하다 강제 해산되는 일도 발생했다.
이란 정부의 강압적이고 통제적인 정책에 반발하며 이란을 떠났지만, 이란을 여전히 스스로의 조국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이란 사회와 유리되어 이제 이란으로 돌아갈 일조차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이란의 진보와 발전을 염원하는 사람들. 세계 각지에 흩어진 그 디아스포라의 힘은 이제 더 이상 주변적이지 않다. 이란의 시위가 이어지는 핵심적인 동력원이 되어주고 있다.
다음을 생각한다
물론 언급했듯 과거 이란에는 여러 차례 반정부 시위가 있었다. 이란 사회 전체를 흔들 만큼 큰 시위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때 디아스포라 집단이 수행한 역할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란 정부가 인터넷 차단과 위성 수신기 범죄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에는 외신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시위대 내부의 정보 공유를 막기 위한 것도 있었겠지만, 디아스포라 집단과 국내 이란인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한 것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란인 디아스포라는 이란 정치의 적극적인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이란인이지만 각지로 흩어진 이민자라는 정체성은 그 힘을 더 강력하게 만들고 있다. 어쩌면 그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디아스포라의 힘이 있었기에, 유가 폭등이나 경제 문제를 지적했던 지난 시위와 달리 이번 집회는 '히잡'이라는 상징과 이슬람 신정정치 그 자체를 겨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치체제 자체의 근본적 변혁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이민자뿐 아니라 체제에서 소외된 다른 세력의 목소리도 이 시위에 충분히 더해지기 시작했다. 히잡 착용 강제의 대상이 되었던 이란 여성의 저항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여성 차별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지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사례다.
크게 주목받고 있지는 않지만, 사건의 당사자였던 마흐사 아미니는 쿠르드인이기도 했다. 이란 정부는 이번 시위가 쿠르드계의 독립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쿠르드인에 대한 탄압과 폭력도 거세다. 그런 만큼 이번 집회에 쿠르드인의 목소리도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청년집단 역시 마찬가지다. 변화하지 않는 사회와 계급 구조 아래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청년 계층은 다시 한 번 집회의 주요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란 최고의 대학으로 알려진 샤리프 기술대학교 학생들 역시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대학가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이 이어지며 국제 학계의 규탄 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결국 디아스포라 집단이 형성한 체제 변혁의 가능성 위에, 그간 이란 정치체제의 외부에서 소외되어 있던 여러 집단이 규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섣불리 쉬운 승리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번 집회가 예상보다 긴 기간, 더 강력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번 집회로 이란의 정치체제와 사회문화 전반이 혁신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란 정부의 탄압은 여전히 강력하고, 청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에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한 달, 국내와 국외를 가리지 않고 이란인들은 이 다음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의 희망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런 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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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히잡' 시위 한 달, 어떤 희망을 확인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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