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필화한승헌 법조 55년 그 치열했던 싸움의 기록
문학동네
거지가 왕자로 변하고, 벼락부자가 벼락거지로 바뀔 수 있지만, 변호사에서 곧바로 피의자가 되는 경우는 흔치 않는 일이다. 사례가 있긴 있었다. 1974년 강신옥 변호사가 민청학련사건을 변호하던 중 변론 내용이 문제되어 긴급조치위반 혐의로 피고인이 되었다. 그는 변론에서 "나의 심정은 피고인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을 받는 편이 더 편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한승헌은 시국사건 변호사로서 변론과 각급 반독재 민주화운동단체 활동으로 정권에 미운털이 박히고 찍혔다.
"실제로 나는 정보ㆍ수사기관의 감시대상이 되어 도청ㆍ미행ㆍ탐문ㆍ위협ㆍ방문의 '객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초기에는 몰래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내놓고 했다. 사무실로 찾아오거나 밖에서 좀 보자고 해서 대면을 했는가 하면, 사무실 건물 어귀에 차를 세워놓고 있다가 내 차가 움직이면 따라 붙기도 했다. '남산'(중앙정보부의 별칭)에 연행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석 1)
이병린 변호사의 구속사건에 변론을 맡으면서 중앙정보부가 손을 떼라고 협박하다가 말을 듣지 않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1월 21일(1975년) 저녁 퇴근길에 자택 근처에 잠복중이던 기관원들에게 남산(중정) 지하실로 끌려갔다. 건장한 젊은이 세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틀 밤에 걸친 철야 밤샘조사가 끝난 후 반공법 4조, 국가보안법 11조, 형법 57조 등 위반혐의로 검찰에 넘겨졌다.
그가 <여성동아> 1972년 12월호에 쓴 사형제를 비판하는 에세이 <어떤 조사(吊辭)>를 최근 펴낸 <위장시대의 증언>에 다시 실었는데, 이것이 간첩으로 처형된 김 아무개를 애도하는 글이라고 몰아 구속한 것이다.
'간첩'의 '간'자도, 김 아무개의 '김'자도 없었고, 또 그런 것을 떠올리게 할 만한 아무런 표현도 없었다. 그런데도 2년 반 전에 발표된 그 글까지 찾아내서 문제 삼는 것을 보고, 그들이 얼마나 나를 노리고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이병린 변호사의 구속 배경 '폭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다는, 참 겉 다르고 속 다른 정보기관의 본색 그대로였다.)
잠 안 재우기 시달림 속의 문답 설전으로 날이 밝고 나서 본격적인 조서작성이 시작되었다. 전날 밤 내가 혐의를 부인한 것을 어떻게든 뒤짚고 자백을 받으려는 심산이 보였다. (주석 2)
3일 만에 풀려났다. 그 즈음 2.15석방으로 풀려난 김지하가 <동아일보>에 <고행(苦行)>이란 글에서 '인혁당 고문조작'을 폭로했다가 다시 구속되었다. 한승헌은 3월 20일 변호사 선임계를 내고 그의 변론에 나섰다. '남산'에서 반공법위반사건이 아직 미결상태이니 김지하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협박을 했으나 굴하지 않았다. 다음날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기소되었다.
검찰의 고소장은 "수필의 내용 및 발표 행위가 북괴 간첩 김규남을 애국인사로 보고 동인이 마치 사회질서와 국가방어라는 전체 주주를 내건 한국에 잘못 태어나고, 권력과 법의 남용으로 인하여 비합법적으로 살해된 것 같이 표현하여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그 구성원인 동인의 활동을 찬양 고무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주석 3)
이 사건의 변론은 정부 수립 이래 동일 사건으로서는 최초로 103명의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 변호인단 103명은 4월 9일 〈변호인 의견서〉를 검찰에 제출하였는데, 그 서두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동료 법조인 한승헌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금되었다고 함은 우리 재조, 재야를 막론하고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 씨는 20년에 가까운 변호사, 검사 생활을 통하여 그 누구보다도 자유민주주의적 신념이 굳고 그 신념에 따라 뚜렷하게 행동하여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동 씨가 북괴의 활동에 동조하여 적을 이롭게 한 행위를 하였다고는 아무도 믿어주지 아니할 것이며, 지금 혐의사실로 되어 있는 동 씨의 수필 내용이 반공법 제4조에 해당하는 행위라고는 결코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이에 변호인 일동은 다음과 같이 이 사건에 대한 소신을 피력하면서 검찰 당국의 명석한 판단이 내려질 것을 간곡히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주석 4)
독재권력에 단단히 찍힌 한승헌이 권력의 하수기관으로 전락한 사법부에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법조인의 상식에 따라 항소심 재판정에서 사실을 개진하였다.
이 수필이 "첫째, 김규남이라는 특정 사형수를 그 대상으로 적시하여 썼다는 점과, 둘째, 그의 죽음을 비합법적인 재판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그의 활동을 찬양ㆍ고무하였다는 점에 관하여, 제1심 판결은 이 두 가지 문제점을 전혀 도외시한 채 이뤄졌다고 주장, 그런 혐의사실을 인정할 만한 적법하고 합리적인 증거가 있었다면 판시가 그렇게 나올 리가 없다. 따라서 제1심이나 원심판결은 본 공소사실에 대하여 범죄의 증명이 없다는 건 실토한 것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즉 그는 사형제에 대한 평소의 비판적 입장과 국제 앰네스티의 사형폐지운동 밑 미 연방대 심원의 사형 위헌판결 등이 연상되어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제기하고자 하여 쓴 수필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주석 5)
주석
1> <자서전>, 184쪽.
2> 앞의 책, 187쪽.
3> 김삼웅, <한국 필화사>, 250쪽.
4> 앞의 책, 251쪽.
5>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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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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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화사건 전담 변호인'에서 '필화 피고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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