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1931.6.18)에 실린 오동진의 사진
동아일보
광복군총영 평양 폭탄대 소속으로 국내 침투
광복군총영에게 부여된 첫 번째 임무는 '국내에서의 다발적 의열투쟁'이었다. 미 의원단의 방한에 맞춰 서울·평양·선천·신의주 등에서 관공서 폭파·관공리 암살 등의 의열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한국인의 자주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거사는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의용단(義勇團)도 합작하는 대규모 계획으로 추진됐다. 거사용 폭탄은 상하이의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이 제조한 12개를 임득산(林得山)이 안동의 이륭양행(怡隆洋行)까지 운반한 후 다시 의용단의 국내 각 지단으로 비밀리에 보냈다.
거사를 담당하게 된 광복군총영에서는 다음과 같이 4개조의 폭탄대(爆彈隊)를 조직, 국내로 급파했다.
<광복군총영 폭탄대 조직>
서울 방면 : 김영철(金榮哲), 김성택(金聖澤), 김최명(金最明)
평양 방면 : 문일민(文逸民), 장덕진(張德震), 박태열(朴泰烈), 우덕선(禹德善), 안경신(安敬信)
선천 방면 : 이학필(李學弼), 임용일(林龍日), 김응식(金應植)
신의주 방면: 이진무(李振武), 정인복(鄭仁福)
문일민은 평양 폭탄대의 일원으로 평양 침투 공작의 임무를 맡았다.
문일민의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문일민 이력서>에 의하면 당시 문일민은 평양 폭탄대의 대장으로 대원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태열 혹은 장덕진이 대장이었다고 하는 기록들도 있어 누가 대장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평양 폭탄대는 1920년 7월 중순(음력 5월 하순) 서울 폭탄대를 먼저 배웅한 뒤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이들은 폭탄 3개와 권총 4자루에 실탄 300발을 휴대하고 안쯔거우 본부에서 출발해 쪽배로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에 잠입한 대원들은 일제의 눈에 띄지 않게 험한 산길로 이동했다. 수중에 여비가 있었지만 전해 흉년이 심했던 탓에 금전으로도 음식을 사기가 곤란했다. 이들은 옥수수 등으로 굶주림을 해결하면서 평양을 향해 계속 걸었다. 평양 폭탄대의 일원이었던 박태열은 이 시기의 괴로움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한 바 있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려는 유일한 희망을 가진 일행은 중도의 간난(艱難)이 더욱 심하였다. 행인이 전혀 없는 험악한 산길로만 가게 되었다. 출발한 당일부터 노숙과 피곤과 기갈뿐이었었다. 그러나 도저히 큰 길이나 도시 부근으로 갈 수 없었다. 중도에 적경(敵警)을 두려워함보다도 사명인 목적을 완성하자면 아니 그럴 수도 없었다." - 박태열, <張德震傳>, 삼일인쇄소, 1925, 19쪽.
중간에 웬 무뢰배 한 명이 시비를 거는 바람에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뻔한 일도 있었지만 안경신이 "작은 분노를 참아 큰 용기에 방해되지 않게 하자"고 대원들을 다독인 덕분에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렇게 대원들은 큰 탈 없이 의주(義州)-삭주(朔州)-구성(龜城)을 차례로 지나 7월 30일 아침 평안남도 안주(安州)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