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소년소녀가극 성황. 1924년 1월 언양소년소녀가극은 극작가 신고송의 첫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훗날 카프문학운동의 계기는 언양의 소년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조선일보, 1924.01.11.)
조선일보
인섭보다 두 살 아래인 신고송(신말찬, 언양공보 7회, 10회, 1907~?)은 1925년 3월 언양공보를 졸업할 때까지 언양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는 언양소년회 활동으로 바빴던 시절이었다. 그는 훗날 "3ㆍ1운동 이후에 이 고장에서 알어난 청년운동, 소년운동에 열심히 동원된 한 소년의 생활에 적지 아니한 영향을 주었다"라고 고백하였다.
언양공보 6회 1920년 3월 졸업한 신고송은 편모슬하에 살았고 형은 북간도로 돈을 벌러 가서 소식도 없었다. 가난한 살림에 상급학교 진학은 꿈을 못 꾸고 동네 금융조합에서 한 달 12전을 받으며 급사생활을 하였다. 학자금을 보내준다는 형은 소식도 없어 형을 원망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돈의 힘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을 형편이 아니었다. 1923년 보통학교가 4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어 다시 5학년에 입학하여 1925년 3월 언양 공보를 10회로 졸업하였다.
신고송은 1923년 10월 6일 언양소년회 창립 당시 임원이었다. 1923년 10월에 창립된 언양소년단은 1923년 11월 소년단의 취지와 필요를 선전하기 위하여 17일 추계대운동회를 하고 다음 해 1월 초에 소년소녀가극 공연을 하려고 하였다. 신고송은 무대를 꾸미고, 동화를 암송하고, <밥 강엿>과 <쌀기와 금깡자>, <홍그래비(방아깨비)와 지렁이>, <흑> 등의 극 공연을 준비하였다. 아마 당시 신고송은 소년소녀극공연의 총책임자로 활동한 것 공연을 마친 뒤 만세 세 번을 부를 정도로 기뻤다.
신고송은 동화와 동극을 같이 준비한 1주일은 대단히 바빴다. 이때의 일기를 <어린이>에 발표했다. 그의 최초의 발표작이었다. 공연은 참으로 상상 이외의 성황을 이루었다.
언양소년회와 언양청년회 주최로 1924년 8월 7일에는 현상웅변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신말찬(신고송)은 "참다운 가정교육의 맛을 보여주시오."란 주제로 1등을 하였다. 아마 그의 가정상황에 비추어 어릴 때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연설로 추측된다. 그는 이때 "여자의 해방"으로 3등 한 김두이와 1930년 결혼을 하였다.
언양 공보시절 신고송은 소년회 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정구도 즐겼다. 그리고 <신소년>에 1924년 3월부터 1925년 1월호까지 총 19번의 글을 보냈지만, 글은 게재되지 않았다. 아직 그의 문학적 재능은 드러나지 않은 습작기 시절이었다. 그는 <어린이>와 <신소년>의 독자로서 '독자란'을 통해 언양소년단과 지역 소식을 알렸다. 글은 번번이 '선외 가작'으로 신고송과 신말찬의 이름을 올렸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길러나갔다. 그에게 소년 잡지는 친구이자 선생님이었고 희망이었다. 나아가 전국적으로 여러 사람을 알게 해 주는 징검다리였다. 그는 윤석중, 이원수, 서덕출, 윤복진 등과 교류하게 되어 <기쁨사>와 <등대사> 동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1925년 3월 언양공보를 졸업하고 신고송은 1925년 4월 대구사범대학에 진학하며 대구 시절을 맞이한다. 대구에서 그는 문학적 재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게 된다. 1925년 11월 잡지 <어린이>에 <우체통>이 제10회 아동문학 현상공모에 입선하여 본격적인 작품 발표와 아동문학운동을 하였다. 「우테통」은 익살스럽고 명랑한 어린이 호기심을 그대로 표현했다.
"길가에 빩안동이 웃독 우테통// 육십(六十)이 넘어도. 맘이 어려서// 빩안 상투 빩안 바지/ 빩안 저고리// 얼골까지 빩앗케/ 차리고 서서// 작은 편지 큰 편지/ 가리지 안코// 주는 대로 삼키고/웃득 서 잇네"
두 번째 발표한 <진달래>는 어린이 눈으로 본 자연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산비탈 양달에도/ 봄이 왓다고// 진달네 보라꽃이 /픠여남니다.// 나무꾼 점심밥도/ 양지쪽에서// 진달네 향내 밋헤/ 열리임니다"
순수한 어린이의 동심에서 우러나온 발상과 체험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동요의 리듬이 4․4나 7․5조였다. 신고송은 작품을 발표함과 더불어 작가로서 신고하게 되었다. 1926년에는 동아일보에 동화시 <옵바를 차자서>가 게재되었다.
옛날도 아주옛적 아주옛날에 / 순이는 어머니를 일허버리고/ 무서운 계모를 맞었습니다 / 날마다 그어미는 어린순이를/ 함부로 때리면서 못살게해요 (이하 생략)
계모로부터 구박을 받으며 집에서 쫓겨나간 주인공 순이가 정대룡이라는 신이(神異)한 인물을 만나 계모의 모략을 이겨내고 행복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옛이야기에 리듬을 맞춘 것으로, 동화를 리듬감 있게 7.5조로 표현한 실험적 작품이었다.
이것은 동요와 동화를 합한 '동화시'라는 장르를 창출한 것이다. 이것은 율조에 따른 리듬을 가미하여 동화구연이 가능한 것이었다. 신고송이 언양소년회에서 했던 가극이 동화시 형태로 변화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동화와 동요가 결합하여, 발전적으로 노래와 춤을 합한 아동극으로 훗날 더 발전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 작품으로 여겨진다.
1926년 신고송은 경성의 윤석중, 마산의 이원수, 대구의 윤복진, 울산의 서덕출과 함께 <기쁨사> 동인으로 <굴렁쇠>에 글을 발표한다. 또 대구사범에서 만난 윤복진과 같이 <등대사> 동인으로 활동한다. 이제 신고송은 동시와 동요를 발표하여 아동문학가로서 발판을 다졌다. 대구 시절은 그의 문화운동의 개화기였다.
1927년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가입하고, 카프의 노선에 입각한 작품인 <꾀바른 톡키>를 <어린이> 4월호에 발표한다. 꾀 많은 토끼가 호랑이의 위협을 자혜롭게 물리치는 내용이다. 아는 지배계급을 물리치는 민중의 지혜를 우화적으로 표한 작품으로 사회주의적 성향을 담고 있다.
신고송은 자신의 회상기에서 언양소년단 시절에 대해, 소년의 머리에 형성되기 시작한 '사고방식', '세계관', '주의', '주장'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적인 것이었고, 소년의 '문학사상'과 '창작'은 소부르주아 감상주의, 관조주의였다. 이러한 혼미와 암둔을 깨쳐준 것은 맑스주의 사상이며, 카프의 영향이었다. 그때 그는 대구사범에 입학하여 맑스주의 서적과 프롤레타리아 문예서적을 탐독하면서 1926년 창간된 <별나라>와 1928년에 창간된 <신소년>이 점차 카프의 영향 아래 들어오면서 <어린이>보다 이들 잡지에 관계를 맺었다. 1928년은 그의 인생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아직 계급주의 아동문학가, 비평가로서 활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족주의적 경향에 가까웠다.
김태오 등 동요 작사 작곡가들이 모여 1925년 '조선동요연구협회' 조직하였고, 1929년에는 홍난파가 음악사에서 <조선동요100곡집>을 발간하였다. 참여 동요 작가는 유지영, 홍난파, 윤극영, 윤석중, 신고송, 서덕출, 최순애, 최경화, 이원수, 윤복진, 정상규, 박애순, 박노춘, 최인준, 김귀환, 박영호, 이정구, 박팔양, 곽노엽, 감사엽, 방정환, 김영희, 모기윤, 유도순 등이었다. 당시 쟁쟁한 작가들 속에 신고송도 포함되었다. 상권에 동요 3편, 하권에 2편이 수록되었다.
1927년 2월부터 그는 조선일보에 소년잡지 독후감과 평론 등을 게재한다. 당시 조선일보는 민족주의자들이 편집을 맡아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다. 아동 작가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름과 욕망을 위해서 집필하지 말고 참으로 아동을 위하여 아동을 연구하고 접촉해서 그들의 참된 벗, 맛 좋은 양식이 되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또 그는 문단의 기성 문인들을 질타하고 무산대중을 위한 진보적 작품 창작을 강조한다. 예술지상주의 작가를 정신 상실자로 비판하고, "조선의 현실과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현실을 망각하기보다는 대중의 생활 자태를 정확히 파악한 시를 쓰라고 하였다. 신고송은 아동문학은 아동의 눈높이에서. 민족적 현실은 계급의식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신고송은 1928년 3월 25일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대구공보 훈도 교사로 발령을 받는다. 하지만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청도 유천보통학교로 1929년 좌천되었다. 1929년 그는 카프 아동기관지를 표방한 잡지 <별나라>에 계급대립의식을 드러낸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인 듯하다.
1929년부터 신고송은 소년문예운동의 방향전환과 관련한 <동심에서부터-기성동요의 착오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의기있게 싸울 어린이로 지도할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 민족의 처지가 "강가에 늙은 버들개지/ 잎이 풀어져 슬퍼하나"와 같지만, 이제는 "이 나라 아들아/…/ 집체가튼 물결!/ 호랑이가튼 물결!/ 이 나라 아들아/ 이 위에다 배저라/…"하면서 식민지 현실이 집체 같은 물결과 호랑이 같은 물결이 덮쳐와도 이를 극복하고 이겨나가자고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1930년 새해 벽두에 신고송은 <새해의 동요운동-동심순화와 작가유도>를 신문에 발표하여 동요, 동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신고송은 동심에 기반한 동요쓰기를 강조하며, 동요의 형식과 율격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그릇된 동심을 그리는 어른들은 동요를 창작하지 말라. 7.5조의 정형율에 의한 동요를 어린이는 짓기 어렵기 때문에 자유율에 의한 동시를 적극적으로 강조하였다.
신고송은 동요와 동시를 구별하였다. 동심의 노래로, 동어(童語)로 부르며, 시적 독창성을 가지는 점에서 공통적이다고 보았다. 신고송의 동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동시를 강조하였다. 그는 동심에서 멀어진 동요 창작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성 동요작가와 소년문예운동의 지도자들에게 제 나름의 방향전환론을 제출한 것이었다. 순수한 동심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어린이가 자유롭게 표현할 시적 형식을 신고송은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신고송은 '동시 5제(童詩五題)'를 직접 만들어 발표하였다. 그중의 하나 <입김>을 읽어보자.
산밋헤/ 아츰길에/ 사람과소가/ 입김을뿜네/ 사람김이/ 희나!/ 소김이/ 희나!
신고송이 주장한 10세 이하의 유년 문학은 한편으로 식민지 조선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논쟁은 송완순에 의해 나이에 따라 동요(동시)와 소년시로 구분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양우정은 동요는 부르는 노래고 동시는 읊는 노래로 구별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논쟁은 식민조선의 아동현실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의로 확대 발전되었다. 신고송은 「동심의 계급성-조직화와 제휴함」를 통해 계급주의 아동문학을 강조하였다. 동요ㆍ동시 논쟁은 동요에서 동시(소년시)로, 나아가 "관념(동심)에서 현실(계급)으로" 나아가는 논쟁의 출발점이었다.
"두 달이나 별르다 산 장갑이란다/ 울아버지 닷돈 주고 사 주섯단다" 아버지가 사준신 장갑이 김주사네 셋째 아들 비단장갑보다 더 포근하다면 계급의식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 지게진 나를 보고 좋은 옷 입은 아이가 욕을 하여 차주고 욕하고 싶지만 참고, "엣다 그놈 가다가/ 소똥을 밟아/ 밋그러져 개통에/ 코나 다쳐라"라고 적대적 계급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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