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댁을 찾아 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최미향
- 살면서 가장 슬픈 기억이 바로 어머니의 투병과 임종이라고 하셨다.
"내 나이 22살 때 54세 우리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다. 꽃다운 나이에 가신 어머니는 열여섯살 막내 여동생을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어느날 갑자기 소화가 안 된다는 어머니는 인근 병원에 가셨고, 의사 선생님은 당장 큰 병원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서울에는 실력 있는 의사와 장비가 있으니 괜찮을 줄 알았다.
그곳에서는 '위궤양이 심하여 위출혈이 악화됐다'며 '한 달간 입원 치료를 받으면 된다'는 말을 하셨다. 의사의 말을 듣고 치료를 받아오던 중 치료비가 워낙 비싸다 보니 집을 팔게 되자 어머니는 극구 서산으로 내려와 치료를 받겠다고 하셨다.
나중에 보니 어머니의 병명은 위암이었다. 6개월을 버티지 못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하늘이 노래졌던 그 시절, 나는 그길로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 다니며 사랑하는 내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기를 기도하고 기도했다. 매일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새벽기도를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티던 우리 어머니는 1년을 견디시다 돌아가셨다. 형님이 군대에 있던 관계로 내가 직접 어머니의 임종을 맞아야 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늦깎이로 딴 복지사 자격증... 복지관장 소개로 봉사 시작하게 돼"
-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사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가장 기뻤던 일이 바로 늦깎이 사회복지사 자격증취득이다. 사연이 있다. 한때 장애인복지관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인사위원회에서 '사회복지사 일을 하라'는 권고를 받고 관내 장애인 직업재활반을 운영하게 됐다.
그때 몇몇 사람에 의해 '사무원이 사회복지사 일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라는 악의성 글이 서산시청 게시판에 게재되고 신문에 보도됐다. 본의 아니게 했지만, 상당히 괴로웠다. 그 당시 사표를 낼까 생각하다 오기가 발동하면서 야간대학 문을 두드렸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받으며 '자격증에 부끄럽지 않도록 정말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 봉사를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2005년경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하면서 관장님이 '팔봉면 진장리에 사는 여성장애인이 바깥을 나가지 못하여 머리 손질에 어려움이 많다. 미용 봉사를 해 주면 어떻겠는가?'라는 부탁을 받았다. 딱한 사정을 듣고 미용사인 아내와 함께 그 집을 방문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얼굴은 하늘을 향해 있고 다리는 걷지 못하여 25세가 되도록 집안에서 천장만 바라보며 사는 장애인이었다. 당황스럽고 충격을 받았다. 아내도 아마 속울음을 삼켰을 것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머리를 깎아주게 된 게 지금까지 재가방문 이·미용 봉사를 해 오고 있다.
이런 일을 하면서 건너건너 지켜본 장애인 사망이 약 30명이 넘는다. 장애인은 신체적,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거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