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3일 저녁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압사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에 내외국인들이 직접 작성한 추모글과 그림이 붙어 있다.
권우성
이태원 참사 직후 만난 한 재난 유가족이 말했다. 어린 자식을 냉동고에 넣어둘 순 없어 정부 약속만 믿고 장례를 치른 게 패착이라고 그는 여전히 믿고 있었다. 장례 이후 태도를 바꾼 책임자들을 강제할 방법이 그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 법률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노력해보겠다는 문구는 어떤 법적 효력도 없더라고요."
또 다른 재난 유가족은 참사 직후 슬픔과 비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걸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고 털어놨다. 그때 정신을 차렸다면 진상규명도, 단죄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태원 참사로 혹시 아들의 친구들이 다치지 않았을까 마음을 졸였다는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도 비통하고 억울한데, 죄책감마저 유가족의 몫이다. 책임 있는 자들은 책임을 부인·축소 은폐하는데, 피해자들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문제해결은 사랑하는 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더 어렵겠구나.' 싸우고 싸우다 피해자들이 직면한 혹독한 진실이다.
기본적인 정보조차 제공 받지 못한 피해자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에 따르면 1964년에서부터 2013년까지 50년간 10명 이상이 사망한 재난은 276건에 달한다. 반세기 동안 약 두 달에 한 번씩 대형 참사가 발생한 셈이다. 하지만 재난을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피해지원을 시혜가 아닌 피해자들의 권리로서 생각하게 된 것은 2014년 4.16 세월호 참사 이후부터다. 숱한 모욕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외쳐온 수많은 재난 참사 피해자들과 4.16 세월호 참사 이후 계속되어 온 4.16운동이 만든 변화다.
이에 정부는 '제4차 국가안전관리기본계획(2020~2024)'을 수립하며 시혜적인 공급자 중심의 피해지원을 사람·인권·피해자 중심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1) 그러나 이태원 참사에서 우리가 목도한 건 피해자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정부의 기민한 애도 관리일 뿐이었다. 국가 애도기간, 사고·사망자 표현 지침, 영정과 위패 없는 분향소 등 정부의 일방적인 조치는 사회적 논란만 낳았다.
일각에서 희생자 명단을 공개한 건 또 다른 상처가 됐다. 피해자들이 정부로부터 사고 발생 경과와 내용은 물론 수습 진행 사항과 피해자의 권리 등 기본적인 내용조차 안내받지 못했다는 증언도 들려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대로 된 이태원 참사 해결을 위해 피해자 권리 보장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가장 먼저 제기된 건 피해자들이 '모일 수 있는 권리'였다.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만큼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보를 공유하고 머리를 맞대야 막막함을 넘어설 길이 보이고 오래 버틸 힘이 생긴다. 영국은 피해자들의 만남 주선을 정부 역할로 규정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피해자 모임을 경계하고, 때론 방해까지 한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모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참사에서도 피해자들이, 시민사회단체가 서로를 모았다. 지체된 시간만큼 피해자들의 고통은 깊어졌고, 정부에 대한 불신은 높아졌다.
유엔 등의 국제기구들은 의사결정에서 재난 피해자의 참여와 협의, 정부의 투명한 정보 공개와 보관, 접근성 등을 재난 피해자의 권리로 강조한다. 정보 접근 및 알 권리와 참여권은 재난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정보를 공유 받을 권리가 있다. 그래야 혼란과 불신이 줄고, 제때 필요한 조력을 받을 수 있다. 참여해 목소리를 내고 협의할 수 있을 때, 정책의 의미와 수용성이 제고된다. 진상 및 책임규명, 배·보상, 온전한 기억과 추모의 측면에서도 알 권리와 참여권은 필수적이다.
다른 재난 피해자들의 조력이 권리라는 건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재난 피해자들이 선의의 조언과 조력조차 선뜻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경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비통한 상황에서 판단과 대처마저 쉽지 않다. 이때 먼저 재난을 경험한 피해자들의 위로와 조력만큼 훌륭한 돌봄과 나침반은 없다.
이러한 필요성으로 프랑스는 재난피해자연합의 조력을 피해자들의 권리이자, 재난피해자연합의 권한으로 규정한다. 재난피해자연합은 피해자를 위한 조력뿐 아니라, 행정관청과 대중매체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피해자들의 실태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 역시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