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병국씨.
변상철
인천이 고향인 김병국(68)씨를 만난 곳은 경기도 안양의 한 카페였다. 김씨가 13살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오징어잡이를 하기 위해 강원도 속초로 이사했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김씨 역시 학업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부터 배를 타야 했다.
"16살 때에 아버지를 따라 오징어 배를 탔어요. 그런데 멀미를 해서 배를 오래 못 탔어요. 결국 몇 번 배를 타다가 그만두고 집에서 쉬었죠. 그러다가 17살 되던 해 여름에 다시 배를 탔어요. 오징어를 잡으려고 멀미약을 잔뜩 먹고 탔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해부6호를 타게 되었는데 그 배가 그만 북한으로 잡혀간 거죠."
오징어 철이 아닐 때는 밤빵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다고 한다. 겨울 명태잡이 철에는 그 밤빵을 만들어 항구에 들어온 명태잡이 선박에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명태와 바꿔 오기도 했다고 한다. 한번은 밤빵과 명태를 교환하기 위해 선박에 오르다 미끄러져 겨울 바다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1972년 납북된 '해부6호'에는 김씨 홀로 승선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지 않는 이유를 묻자 김씨는 부자지간에는 배를 같이 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배를 타다 보면 작업 중에 나누는 뱃사람들의 대화가 험하고, 행동 또한 거칠다 보니 작업을 하는 도중에 무척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보다는 친구들과 배를 타는 것이 편했다고 한다. 당시 함께 해부6호에 탄 친구들이 정용태, 박문길, 김두익 등이라고 했다. 오징어 배는 작업 전 그물이나 낚시 등을 정비하고 기계에 걸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서로 도와가며 작업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고 했다.
해부6호가 출항한 때는 1971년 8월 18일 오후였다. 김씨와 친구들은 며칠 분량의 도시락, 쌀 등을 챙겨 출항했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 바다였기에 선실에 들어가 있기보다는 배 아무 곳에나 누워 바다를 보거나, 하늘을 보며 조업하는 곳까지 나아갔다고 한다.
해부6호는 나침반에 의존해 4시간 정도 항해했다. 나이 어린 김씨 등은 조업 장소나 방향을 알 리 없었다. 배에는 라디오, 무전기 등 전자장비도 없었기에 조업 장소를 알 방법은 없었다고 한다. 저녁 7~8시경 조업하는 곳에 도착한 김씨는 어구를 손질하며 준비를 마친 뒤 밤 9~10시경 조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조업 첫날 밤새도록 작업했으나 실적이 그다지 신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날도 조업을 이어갔으나 비까지 오면서 오징어가 그다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선장은 철수하기로 하고 배를 돌려 속초항으로 향했다. 선실 안으로 들어가서 잠을 자던 김씨는 새벽녘에 시끄러운 소리에 깼다.
인민군 복장 북한 군인 보고 떨어
선실 안으로 총부리가 들어오면서 다 나오라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무슨 영화인가 하며 얼떨떨하게 있던 김씨는 인민군 복장을 한 북한 군인을 보고 나서부터 떨기 시작했다고 한다. 배 앞으로 선원들이 모두 모이자 해부6호에 줄을 걸어 곧장 끌고 올라갔다고 한다.
"두 시간 정도 끌려갔던 것 같아요. 도착한 곳이 장전항이라는 곳이었어요. 처음에는 장전항인 줄 몰랐는데 한국에 나와서 조사받으며 수사관들에게 들어보니까 장전항이라고 하더라고요. 장전항에서 며칠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북한에 있을 때 북한 사람들이 북한 실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북한이 잘 산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반공교육을 받았잖아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 '미친놈들, 진짜 그런가'하고 의심하면서 북한 사람들 말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저 북한 놈들이 우리가 네네 하지 않으면 아오지 탄광이나 보낼까 무서워서 형식적으로 네네 한 거죠. 그래도 속으로 인정을 안 했어요."
처음 장전항에 있는 동안 보름 정도 기초 조사를 받았는데 속초의 군부대 위치, 관공서 위치, 설악산 등에 대해 조사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 인근의 휴양소로 이동해서는 그곳에서 '선생'이라고 불리는 지도원들이 한배에 5명씩 배치되어 조사와 생활 감시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여간 조사를 받고 나자 남한으로 귀환할 때까지 북한에 대한 체제 선전과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해주, 강경, 원산, 김책시 등을 돌아다니며 김일성대학, 어린이궁전, 만경대, 모란봉, 백두산 해산진 등에 대한 견학을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북한의 체제를 선전한다고 해도 그리운 고향의 가족에 대한 생각만은 떨쳐낼 수 없었다.
겨울철 혹시라도 탈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스케이트를 타고 감시망을 피해 멀리까지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허름한 인가가 보여 들어간 김씨는 낡고 허물어져 가는 인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선전용 주택이라는 생각에 얼른 그곳을 빠져나와 휴양소로 돌아왔다. 그곳의 체제에서는 탈출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 뒤로 탈출은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씨가 남한으로 귀환한 뒤 수사기관에서 더욱더 가혹한 고문을 당한 이유가 따로 있다고 했다.
"북한에 있을 때 똘똘한 아이는 따로 데려가요. 평양 고려호텔에 며칠을 잡아넣더라고요. 며칠 동안 별다르게 한 것도 없었어요. 고려호텔에서 나오는 음식을 주고, 평양 시내 몇 군데 다녔던 것 외에는 별다른 것도 없었어요. 고려호텔에 갔다고 해서 동요하거나 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더 많이 맞은 것이 그 고려호텔에 갔던 것 때문에 더 많이 맞았어요. 북한에서 포섭 당했을 것이라고 의심을 당해서 더 많이 맞았어요."
군에서도 납북귀환어부라는 이유로 어려움 겪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