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풍경
이정희
우린 사랑에 이끌리게 되면 황량한 사막에서 야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앞뒤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그러나 둘 만의 극적인 여행이 대단원의 말을 내리는 순간 서늘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 이기주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차분하게 돌아보니 친구의 이야기 속 불편했던 지점이 떠올랐다. 마침 내가 다니던 빵집에서 이른바 '인원 감축'이 있었다. 5년 동안 일하던 젊은 기사가 단박에 해고되던 시점, 안 그래도 '알바'인 나 역시 잘리는 건가 하고 마음이 복잡하던 때, 친구는 요즘 샌드위치 기사를 고용하는 데가 어딨냐고 했다.
몇 개월이나마 한 직장에서 오가며 마주치던 기사가 해고되는 과정에 마음이 쓰이던 상황이었는데, 그것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친구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듯하다. 친구와 나의 다른 삶이 서로 다른 생각으로 흘러가는게 여실히 드러났다.
내게 돌아온 질문들
그나저나 이제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온 내가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친구와 계속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내 안에서 올라왔다. 아니 친구만이 아니다. 만나면 자기 남편 얘기, 아이들 얘기만 하는 지인들을 보며 내가 이 만남을 굳이 이어가야 할까? 이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살아냈지만, 결국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걸어나와, '빵집 알바'라는 호구지책으로 살아가는 시간은 내가 지금껏 익숙하게 맺어온 관계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건, 곧 나에 대한, 나의 관계맺음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을 참을 인내심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를 주소서."
라인홀트 니부어의 '평온을 위한 기도' 중 한 구절이다. 예전의 나라면 '관계'란 내가 노력하여 바꿀 수 있는 것이라 정의내렸을 것이다. 실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에게 말했다. 너 아니었으면 우리가 계속 만나기 힘들었을 거라고. 그리고 그런 말을 듣는 걸 자부심으로 여겼었다. 다시 그 관계들을 잘 맺어가기 위해 전전긍긍 애를 썼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살면서 '관계'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고 배우며 자라왔다.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애써 노력을 해야 그나마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게 건강한 관계일까? 이런 질문을 차마 스스로에게 던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게 아닐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맹목적이지 않았나 라고 되짚어 보게도 된다. 저 기도문에서 용기라든가, 인내라든가, 혹은 지혜는 모두, 절대자를 향한 기도이지만, 결국은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들이다. 어쩔 수 없어서 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용기를 내고, 인내하고, 취사선택의 지혜를 가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에게 온 인연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는 나의 선택인 것이다. 지금 여기의 나는 그런 선택의 결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