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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제2의 임보라 목사"... 시민들 눈물 속에 떠난 '성소수자'의 벗

[현장] 7일 새벽 발인식,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 추모 예배... 장지는 서울시립승화원

등록 2023.02.07 10:18수정 2023.02.0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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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새벽 7시, 서울시 강동구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이 진행됐다.
7일 새벽 7시, 서울시 강동구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이 진행됐다.김성욱

"오늘도 이렇게 많이 오셨습니다. 이 장면이 마치 도르가가 죽었을 때를 연상시킵니다. 도르가가 죽었을 때 떼 지어 몰려왔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그 당시 약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과부들이었습니다. 과부들은 도르가가 살아있었을 때 나누어준 사랑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사람은 죽었을 때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더 제대로 알게 됩니다."

7일 새벽 6시 30분, 서울 강동구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 고 임보라 목사의 빈소를 백 명이 넘는 시민들이 가득 채웠다. 앉을 자리가 없어 일부 시민들은 신발장 앞에 서서 고인을 향한 마지막 추모 예배를 올렸다. 임 목사의 발인식이었다. 장례식장 복도엔 성소수자 단체, 인권 단체, 동물 보호 단체, 강정마을 단체, 장애인 단체, 교회와 불교 등 종교단체, 노동조합 등으로부터 온 조화들이 줄을 이었다.

성소수자와 여성, 성폭력 피해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함께 싸워온 임 목사는 지난 4일 별세했다. 향년 55세였다. 임 목사는 1993년 강남 향린교회 전도사부터 목회 활동을 시작,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교연대' 공동대표를 맡아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이끄는 등 기존의 보수 개신교와 달리 성소수자 차별 철폐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임 목사는 지난 2018년, 예장합동·고신·합신 등 개신교계 대형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렸다.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 늘 함께하던 사람" 
 
 7일 새벽 7시, 서울시 강동구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이 진행됐다.
7일 새벽 7시, 서울시 강동구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이 진행됐다.김성욱
  
"임보라 목사님은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 늘 함께 했습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함께 하며 온갖 차별과 혐오의 바람을 함께 맞았습니다. 보수 개신교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차별과 혐오를 일삼을 때, 그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몸으로 삶으로 일깨워줬습니다."

발인 예배를 진행한 목사의 말에 추모객들이 고개를 꺾고 눈물을 훔쳤다. 시민들은 검은 차에 고인이 운구되자 동그랗게 모여 어깨를 걸고 부둥켜 안으며 서로를 다독였다. 일부는 영정에 꽃을 바치기도 했다. 시민들은 임 목사가 작사를 했다는 찬송가를 함께 부르며 울었다.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 평화의 바람아 불어라/ 눈물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가사였다.

오전 7시 20분께 고인을 실은 차량이 장례식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시민들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한 시민은 문 닫힌 차량을 손으로 만지며 한참을 서있었다. 이날 발인식 끝까지 자리를 지킨 한 20대 성소수자는 "목사님께서 조금 더 곁에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며칠 지나 괜찮은 것 같다가도 결국 이렇게 터지는 것 같다"면서 울먹였다. 차량은 장지인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으로 떠났다.

"임보라 목사는 성소수자들, 집 나온 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해고 노동자들, 성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며 도르가를 일으켜 세웠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임 목사님을 일으켜 세웁시다. 우리가 제2의, 제3의, 제4의 임보라가 됩시다."


고인 가는 길에 시민들이 띄운 마지막 기도였다. 시민들은 흐느끼며 "아멘"을 했다.
  
 7일 새벽 7시, 서울시 강동구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이 진행됐다. 임 목사는 성소수자 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섰다.
7일 새벽 7시, 서울시 강동구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임보라 목사의 발인이 진행됐다. 임 목사는 성소수자 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섰다. 김성욱
 
SNS에도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이날 페이스북에 "당신은 세상의 어떤 사람, 어떤 현장도 가리지 않았고 나아가 어떤 동물도 가리지 않았다. 먼저 가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천국은 우리가 꿈꾸던 세상인지 문득 궁금하다"라며 "당신 없는 세상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할 것이라 상상도 한 적이 없어 이 다음이 잘 그려지지 않지만, 우리는 다시 평등한 세상을 향해 걸어가겠다"고 했다.

대한성공회 용산 나눔의집 원장사제 자캐오 신부는 "그는 우리들의 하느님께서 당신과 나를 위해 보낸 마중물이었고 이정표였다"라며 "그는 당신과 나의 숨구멍이었고, 우리 각자의 어두움과 상처 그리고 아픈 이야기를 품어 준 비밀 창고였다"고 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도 성명을 내고 "임 목사님은 열악한 노동자들에게도 벗이셨다"라며 "임 목사님이 꿈꿨던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은 이제 저희들이 함께 이어가겠다"고 했다.
  
 지난 2015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제주해군기지 건설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가 개최한 집회 및 시위의 자유 쟁취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임보라 섬돌향린교회 담임목사가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 참가자들에 부과된 벌금형 대신 노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2015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제주해군기지 건설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가 개최한 집회 및 시위의 자유 쟁취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임보라 섬돌향린교회 담임목사가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 참가자들에 부과된 벌금형 대신 노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연합뉴스
  
[관련 기사]
'성소수자 인권지킴이' 고 임보라 목사를 기억하며 https://omn.kr/22m94
차별과 싸우다 '이단' 몰려... 임보라 목사 별세 https://omn.kr/22ma0
#임보라 #목사 #차별금지법 #성소수자 #차별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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