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보스턴에 있는 존 F. 케네디 도서관에서 열린 포럼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암 투병 중인 지미 카터(98) 전 미국 대통령이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설립한 인권단체 '카터센터'는 18일(현지 시각) 성명을 통해 "카터 전 대통령이 가정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받기로 했다. 여생을 가정에서 가족과 보내기로 했다"라고 발표했다고 AP통신, CNN방송 등이 보도했다.
이어 "가족과 의료진이 카터 전 대통령을 돌보고 있다"라며 "가족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길 바라며,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한 헌사와 관심에 감사하다"라고 덧붙였다.
1924년 조지아주에서 태어난 카터 전 대통령은 해군으로 복무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인 땅콩 농장을 이어받았다. 이 때문에 정치에 입문해서도 '땅콩 장수'라는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
조지아주 상원의원과 주지사를 지냈으나 전국적으로는 무명에 가까웠던 카터 전 대통령은 1967년 대선에서 도덕주의와 인권 정책을 내세워 돌풍을 일으키며 당시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재선을 꺾고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에 올랐다.
단임으로 끝났지만... 퇴임하고 더 빛난 대통령
그러나 임기 내내 위기의 연속이었다. 미국은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기 침체에 시달렸고, 카터 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카디건을 입고 대국민 연설을 하면서 에너지 절약을 호소했다.
1978년 이집트 정부가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 인정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카터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그는 이 협정은 중재하며 중동 평화를 이끈 것으로 평가받는다.
베트남전 패전 후 미국의 반전 여론을 업고 대선에서 승리한 카터 전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긴급조치를 포함한 한국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면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1979년 주이란 미국 대사관에서 미국 외교관 66명이 1년 넘게 인질로 붙잡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란과 단교했으나, 더 강경한 대응을 바랐던 여론은 등을 돌렸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재선에 도전했으나,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 밀리면서 4년 만에 백악관을 떠나게 됐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하고 더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자신의 이름을 딴 카터 센터를 설립하고 아이티, 보스니아 등 분쟁 지역의 평화 협상을 주선했다. 특히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하자 직접 평양으로 날아가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도 했다.
노벨위원회는 2002년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 민주주의, 인권,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공로를 인정하며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반면에 다른 전직 대통령들처럼 금전적 이익을 쫓는 대중 연설이나 기업의 사외이사 등은 거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카저 전 대통령을 '비유명인사 대통령'(un-celebrity)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장 위대한 제2막"... 당파 초월한 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