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4월, 유후공원에서 중국 공작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독립기념관
김자동이 가족과 함께 충칭에 도착한 것은 열한 살 때인 1939년 4월이다. 이후 귀국 때까지 7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중학교를 다닌 곳도 충칭이었다. 처음에는 시내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중리런(立人) 중학교여서 기숙사에 들어가 1학년을 마치기 전에 그만 학질에 걸리고 말았다. 시험을 보지 못해 낙제의 위기였다.
그때 행운이 다가왔다. 우리 집 앞에 새 중학교가 문을 연 것이다. 청화(淸華)중학교였다. 병세가 호전되자 나는 2학년으로 편입해 다시 학업을 계속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학교는 베이징에 있는 명문 칭화대(淸華大)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칭화중학 설립에 나섰던 사람들이 전부 칭화대 출신들이라고 했다. 당시 국공합작을 위해 충칭에 머물고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도 학교 개교에 관여했다고 들었다. (주석 5)
일제 강점기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왕궈누(亡國奴)' 즉 "망한 나라의 노예"란 뜻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을 두고 한 말이었다. 김자동이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중국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말다툼을 하게되면 어김없이 '왕궈누'란 말이 튀어나왔다.
한 번은 덩치가 큰 중국 아이와 놀다가 '왕궈누'란 말에 들고 있던 우산으로 찔러 상처를 입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욕은 다 참아도 '왕궈누' 소리가 나오면 가만두지 않았다." (주석 6)
옛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나라를 잃은 '망국노'에 똑같이 '노예 노(奴)'자를 썼다. 나라 잃은 망국의 책임이 국민(백성)에게도 있다는 뜻일게다.
망국의 설움은 어린 내게도 이따금씩 밀려왔다. 부모님을 포함해 내 주변의 어른들은 모두 항일독립운동가였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됐다. 장시성에 살던 시절 한 시사잡지에서 스페인 내전과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략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정부군 쪽에서 열 몇 살 소년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덩달아 분개했다. 우리나라의 일이 아닌데도 "내가 조금만 나이가 있어도 가서 싸울 텐데"하는 생각을 했다. 동병상련의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석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