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한일병합에 관한 기사
조선총독부 관보
여기에 일본 측은 조선식민지가 시작한 후, 여러 차원의 통계를 통해 조선의 경제사정이 개선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식민지 시대를 조선말기와 비교하면서 얼마큼 생활이 개선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체적으로 농업생산량과 인구의 증가 등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 측의 자료를 이용해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이러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조선식민지 지배를 합법이었다고 수용할 수 있을까? 이러한 통계가 주는 의미를 해석할 때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반일종족주의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시대에 대한 해석에는 식민지에 들어설 때까지 펼쳤던 전시상태, 즉, 그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인명피해와 해방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겪은 수많은 희생과 고난을 무시한 채, 일본의 통계자료에 따른 주장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려는 무책임한 입장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일본 방어를 위한 방파제
일본이 조선식민지를 통해 확보하려 했던 목표는 북방세력으로부터 조선이 일본의 방어를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식민지란 일본 가까이에 또 다른 일본이 되어, 일본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일본의 방위개념이다. 신냉전시대로 돌입한 오늘날, 북중러로부터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한국이 연대하여야 한다는 방위개념으로 재설정되어 강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혐한활동과는 관계없이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한일 내지 한미일연대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고구려 국내성 가까이에는 환도산에 위나엄성이라는 형제성이 있다. 이는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이 닥쳐올 때, 본성인 국내성을 방어하면서 지원하는 보험성격의 성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2차대전에서 패전한 후, 현재 한국과의 관계는 조선 전체는 아니지만 반쪽을 안전보장상 형제성으로 두어야 한다는 목표와 어느 정도 그러한 목표에 도달했다는 자부심에 안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윤석열 정부를 통해 한국을 일본과 공유하는 자유, 민주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제국의식
정한론이 전개된 이후, 일본의 조선정책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식민지는 일본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방파제라는 인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조선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어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된다.
한일국가 간의 대결과는 별도로 일반인들이 상대국에 대하는 의식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조선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으로부터 총독부 행정관료, 군인 뿐만이 아니라, 교사 등 전문직을 비롯한 많은 민간인들이 조선반도에 흘러들어왔다. 이들이 조선반도와 조선인에 대해 어떠한 의식을 갖고 행동하였는가는 오늘날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많은 민간이들은 행정관료나 군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비호아래 식민지 조선에 대해 그릇된 우월의식을 갖고 행동한 것인데, 조선식민지 지배가 끝난 후에도 이러한 어긋난 의식을 후손들이 물려받아 오늘날까지 작용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고가 한일관계를 불편하게 하는 동기가 되고, 오늘날 혐한의 의식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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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그 내면에 자리잡은 성숙도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는 일본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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