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공원.대나무숲을 조성하여 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볼 수 있다.
이상헌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공격하면서 병참기지로 사용하였기에 붙여진 명칭. 어떤 지명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 교통의 요지이면서 말과 관련된 거리임은 분명해 보인다.
모리배들의 이전투구로 나라를 팔아먹다
인조반정 후 정묘호란이 발발하고 강홍립이 수완을 발휘하여 조선과 후금(청나라)이 '형제의 나라'로 화의가 이루어진 역사는 본 연재 37화(
난초골 따라 생태공원 탐방해볼까?)에서 살펴봤다. 반정을 획책한 53명의 서인 중에 이괄(李适)은 논공행상에 유독 불만이 많았다. 이를 빌미로 여러 모리배들이 이괄에게 반란 혐의를 씌워 제거하려고 한다.
당시 만주에서는 후금이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때였기에 인조 임금은 북방 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 병마절도사로 임명하여 국경 수비의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문회(文晦)와 이우(李佑), 정방열(鄭邦說), 이귀(李貴), 허통(許通), 최명길(崔鳴吉) 등이 합세하여 이괄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뒤집어 씌운다.
▲ 3용 다리 타고 달터마을 대나무숲 구경 가시죠 #42 ⓒ 이상헌
인조는 그의 충성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서인들의 등쌀에 못이겨 이괄의 아들 이전(李栴)을 잡아들여 취조하기로 결정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이괄은 아들이 잡혀가면 역모로 몰려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군사를 일으킨다.
거병한 지 19일 만에 한양 도성을 장악하니 인조는 공주산성으로 피신하고 뒤늦게 장만(張晩)과 정충신(鄭忠信), 남이홍(南以興)이 관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제압한다. 교전에서 패배하자 수하인 이수백(李守白)과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괄을 비롯한 반란 주동자 9명의 목을 베어들고 정부군에 투항한다.
이괄의 난은 삼일천하로 끝났지만 12년 후 병자호란의 원인이 된다. 반란군의 한 명이었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달아나 조선 침략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의 결과 인조는 청 태종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였고 형제의 나라에서 '군신의 나라'로 굴복한다. 역사에 기록된 삼전도의 치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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