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구입한 초판본 <사슴> 시집, 직접 촬영
이준만
[이전 기사] 백석 시집을 다시 읽다 https://omn.kr/2305f
앞서 백석 시집을 다시 읽고 다섯 편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적어 보았다. 시 전문을 가만가만, 나직나직 읊으며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헌데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 참 좋은 시들이 넘쳐난다.
몇 편 더 읽어 보자. 타오르는 불을 보며 멍 때리듯, 시를 읽으며 가끔씩 세상 시름을 잊어 보자. 불멍이라는 게 있으면 '시멍'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는가?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중략)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시 '삼천포' 일부
평화롭고 따사로운 정경이다. 도야지새끼들이 '졸레졸레' 간다. 아마도 어미 돼지가 앞장섰으리라. '졸레졸레' 간다고 했으니, 도야지새끼들의 방둥이가 살랑살랑 거렸을 듯싶다. 그 광경을 귀밑을 '재릿재릿' 하게 하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바라보고 있다. 흙담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말이다. 모르긴 해도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입가에는 미소 한 줄기쯤 머금었으리라.
시선을 천천히 돌려 보니, 소 한 마리가 기르매(등에 얹는 안장)를 지고 게으른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조을고' 있다. 이런 광경을 떠올리면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풀어지기 마련이리라. 아, 그런데 모두들 가난하다니. 짠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따사로이 가난하단다. 그때는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을 터이다. 가난한 풍경에 따사로움 한 줌. 가난을 조금은 눅여 준다. 부족함 없이 사는 지금과 가난하지만 따스함이 있던 그때를 견줘 보는 건 어떨까?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 명태는 꽁꽁 얼었다 /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시 '멧새 소리' 전문
춥다. 몹시 춥다. 말리려고 처마 끝에 매달아 논 명태가 꽁꽁 얼었다. 꽁꽁 언 명태를 보며 화자는 서러움을 느낀다. 차가운 날씨와 사무치는 서러움으로 인해 화자도 명태처럼 꽁꽁 언다. 명태는 처마 끝에서, 화자는 문턱에서. 명태는 꼬리에 고드름을 달고, 화자는 가슴에 고드름을 단 채로.
이 시는 이게 다인가? 뭐, 그래도 상관은 없다. 그런데 어, 왜 제목이 멧새 소리지? 라는 의문이 든다. 멧새는 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멧새는 시 밖에서 울고 있을 터. 시 밖에서 울고 있는 멧새 소리가 시 안으로 흘러와 화자에게 들려오는 것이다.
아마 그리운 사람을 두고 온 방향에서 멧새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그 소리를 들으니 더욱 서럽고 더더욱 추워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을 달고 꽁꽁 얼어가며 문턱에 앉아 소리 나는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