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집을 또다시 읽다

등록 2023.03.09 16:53수정 2023.03.0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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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구입한 초판본 <사슴> 시집, 직접 촬영
직접 구입한 초판본 <사슴> 시집, 직접 촬영이준만

[이전 기사] 백석 시집을 다시 읽다 https://omn.kr/2305f

앞서 백석 시집을 다시 읽고 다섯 편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적어 보았다. 시 전문을 가만가만, 나직나직 읊으며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헌데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 참 좋은 시들이 넘쳐난다.


몇 편 더 읽어 보자. 타오르는 불을 보며 멍 때리듯, 시를 읽으며 가끔씩 세상 시름을 잊어 보자. 불멍이라는 게 있으면 '시멍'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는가?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중략)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시 '삼천포' 일부
 
평화롭고 따사로운 정경이다. 도야지새끼들이 '졸레졸레' 간다. 아마도 어미 돼지가 앞장섰으리라. '졸레졸레' 간다고 했으니, 도야지새끼들의 방둥이가 살랑살랑 거렸을 듯싶다. 그 광경을 귀밑을 '재릿재릿' 하게 하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바라보고 있다. 흙담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말이다. 모르긴 해도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입가에는 미소 한 줄기쯤 머금었으리라.

시선을 천천히 돌려 보니, 소 한 마리가 기르매(등에 얹는 안장)를 지고 게으른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조을고' 있다. 이런 광경을 떠올리면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풀어지기 마련이리라. 아, 그런데 모두들 가난하다니. 짠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따사로이 가난하단다. 그때는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을 터이다. 가난한 풍경에 따사로움 한 줌. 가난을 조금은 눅여 준다. 부족함 없이 사는 지금과 가난하지만 따스함이 있던 그때를 견줘 보는 건 어떨까?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 명태는 꽁꽁 얼었다 /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시 '멧새 소리' 전문
 
춥다. 몹시 춥다. 말리려고 처마 끝에 매달아 논 명태가 꽁꽁 얼었다. 꽁꽁 언 명태를 보며 화자는 서러움을 느낀다. 차가운 날씨와 사무치는 서러움으로 인해 화자도 명태처럼 꽁꽁 언다. 명태는 처마 끝에서, 화자는 문턱에서. 명태는 꼬리에 고드름을 달고, 화자는 가슴에 고드름을 단 채로.

이 시는 이게 다인가? 뭐, 그래도 상관은 없다. 그런데 어, 왜 제목이 멧새 소리지? 라는 의문이 든다. 멧새는 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멧새는 시 밖에서 울고 있을 터. 시 밖에서 울고 있는 멧새 소리가 시 안으로 흘러와 화자에게 들려오는 것이다.

아마 그리운 사람을 두고 온 방향에서 멧새 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그 소리를 들으니 더욱 서럽고 더더욱 추워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을 달고 꽁꽁 얼어가며 문턱에 앉아 소리 나는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정본 백석 시집(문학동네)의 시 '국수'가 수록된 쪽을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정본 백석 시집(문학동네)의 시 '국수'가 수록된 쪽을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이준만
 
눈이 많이 와서 /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중략)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중략)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시 '국수' 일부
 
산새가 먹이를 찾으러 들판으로 내려오고 재빠른 토끼도 가끔 눈구덩이에 빠질 정도로 함박눈이 함빡 내린 겨울 어느 날. 산골 마을은 은근히 흥성흥성 들뜨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이 예부터 반가워하는 상대이다.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하고 고담하고 소박한 것. 바로 국수다. 우리는 냉면이라고 부른다.

백석의 고향은 평안도 정주. 거기에서는 냉면을 국수라고 부르나 보다. 누군가가 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냉면 만들어 먹는 날, 온 마을이 구수한 즐거움에 싸여 들뜬다고 하니 말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언제 한번 엄청 추운 겨울날에 평양냉면을 먹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한 번도 한겨울에 냉면을 먹어보지는 않았다. 칼국숫집을 먼저 찾아 들어가게 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잘도 쪽쪽 거리면서도 말이다. 올겨울에는 진짜로 한겨울 평양냉면 먹기에 도전하리라. 슴슴한 평양냉면을 먹으면서 나와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리라.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 이 흰 바람벽에 /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중략)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하략)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일부
 
지치고 지친 화자가 축 처진 채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맞은 편에 흰 바람벽이 있다. 힘없이 흰 바람벽을 바라본다.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가는 흰 바람벽. 가난한 늙은 어머니는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 맨손으로 무와 배추를 씻고 있다. 아주 잠깐 동안 지어미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 먹는 장면이 스치듯 지나가지만, 곧 혼자임을 깨닫고 다시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엄습한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을 위로한다. 하늘이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도록 만들어졌다고. 아,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으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까? 가슴이 저릿저릿해진다. 화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리다. 바삐 사노라면 결코 생겨나지 않는 감정이다.


시를 읽으며 시에 나타난 상황을 떠올리며 시적 화자의 처지에 공감해 보자. 평화롭고 정겨운 장면에 나오면 빙그레 미소가 돌고, 처절하도록 슬프고 아픈 화자의 처지를 만나면 가슴이 저릿할 것이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세상사를 잊고 오롯이 자신만의 세계를 가져 보자. 다시 세상 속으로 달려나갈 힘이 생길 수도 있을 터이다.

초판본 사슴 - 1936년 100부 한정판 백석 시집

백석 (지은이),
소와다리, 2016


#백석 #시집 #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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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지방 소도시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 2년을 제외하고 일반계고등학교에서 근무. 교사들이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음.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몹시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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