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난이 사는 집> 표지
오월의봄봄
판잣집을 모르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한다.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판자촌은 재개발의 광풍으로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판자촌의 이미지를 없앤다며 동네 이름도 바꾸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힌다. 그나마 겨울이 되면 유명인들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중계동 백사마을에서 연탄을 짊어지고 나르는 덕에 도시 빈민들의 빈곤을 상징하는 백사마을의 삶의 터전은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곳도 재개발 예정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판자촌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 바로 옆에 판자촌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비닐하우스촌과 판자촌이 함께 있던 것 같다. 번지르르한 대법원과 검찰청 바로 길 건너에 있던 이곳은 당시 고등학생인 내가 보아도 외딴 섬 같았다. 뭣 모르던 우리는 "여기 사는 사람들, 알고보면 진짜 부자들이래"라고 수근대며 가끔 등장하는 쎄단차를 보며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한때 서울 시민의 40%가 살았던 판자촌, 지금은 어디에
책 <가난이 사는 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판자촌에 대해 소개한다. 저자 김수현은 판자촌을 통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주택문제,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과 판자촌 공동체의 의미,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사고, 도시 개발, 세계의 판자촌 등의 주제들을 통찰한다. 판자촌뿐만 아니라 비닐하우스촌, 반지하, 쪽방, 옥탑방, 고시원 등 빈민층과 서민층의 주거지에 대한 현실과 고찰, 그리고 더 나아가 주거권의 문제까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주거의 세계에 대한 시야를 넓혀준다.
저자에 따르면 한때 서울 시민의 40%가 판자촌에 살았다고 한다. 1980년에만도 10% 이상이 판자촌에서 살아갔다고 하니 그 수에 놀랐다. 그런데 지금, 그 많던 판자촌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 그 많던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단순히 집의 형태를 넘어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저자는 판자촌을 "팍팍한 서울 살이를 헤쳐나갈 수 있게 한 복지공동체이자 도시 속의 농촌"으로 보고 있다.(p.5) 주로 고향 사람, 친척들끼리 한동네에서 살고, 부모가 일터에 나가면 골목길 할머니들이 남아있는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등, 판자촌은 그 자체가 직업소개소, 직업훈련원, 신용협동조합, 어린이집, 유치원 때로는 심리상담소 등의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판자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공동체로서의 의미를 강조한다. "판자촌은 농촌을 떠난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 생활에 적응하고, 또 빈곤 속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한 사회·경제적 공동체였다. 결국 판자촌은 (중략) 재생산 공간만이 아니라 거대한 생산 네트워크 조직이었다"(p.87)라며 판자촌의 공동체성을 부각시킨다. 우리가 흔히 '판자촌'이라 하면 '달동네'를 떠올리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달빛처럼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판자촌이 지닌 공동체성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성은 재개발의 광풍이 시작되며 판자촌 주민들이 흩어지며 깨지게 된다. 판자촌에 사는 사람들의 저렴하지만 가장 토대가 되는 노동력을 바탕으로 이뤄낸 한국경제의 성공이 판자촌 해체를 재촉하며, 판자촌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 단지로 개발했다. (p.184) 판자촌에서 쫓겨난 이들은 또다시 가장 싼 주거지로 몰려들었다. 영구임대주택,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쪽방 등이 판자촌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p.185)
저자에 따르면 이 주거지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쁜 주거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판자촌이 울타리의 역할을 했다면, 판자촌이 해체된 이후에는 단신, 가족, 청년, 노년층들이 각각 나름의 편리한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가난한 집의 분화의 특성화'라고 지칭한다. (p.185) 즉 기존에 판자촌이 가지고 있던 공동체성은 해체되고, 각개전투의 삶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2023년 현재 집안에서 홀로 아무도 모르게 고독사 하고, 주변의 도움을 자의 혹은 타의로 거부(당)하고 가족이 함께 죽음을 선택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판자촌에서 사라진 가난은 여전히 곳곳에
이 책을 읽으며 정태춘의 노래 '우리들의 죽음'이 생각났다. 마음이 너무도 아파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 1990년, 맞벌이 부모가 일하러 간 사이에 화재로 남매가 숨진 사건에 가수 정태춘이 곡을 붙였다. 2023년 현재에도 부/모가 일하러 간 사이에 자녀들이 죽었다는 기사를 꽤, 자주 접한다. 지난한 세월동안 분명 한국사회는 대단한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냈는데 주거 지역에서의 공동체성이 사라진 지금은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있다. 판자촌에서 사라진 가난은 여전히 곳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더 외롭고 쓸쓸한 모습으로.
한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판자촌 이후의 재개발에 대해서도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진다. "개발이익이 많다면 적절히 공유하고, 적거나 없다면 공공지원을 더 늘리는 방식으로, 오래된 저층 주거지들을 사람이 살기 좋은 주거공간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며, "어떤 방법을 택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저렴주거를 보호하거나 대체공간을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256) 건설사와 집주인, 투기꾼들의 이익을 위주로 돌아가는 재개발 정책에 대해 뼈아픈 조언이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은강이는 자를 대고 끝이 뾰족한 삼각형의 먹이 피라미드를 그린다. 아버지가 설명을 부탁하자, "그래도 전 알아요. 우리는 이 맨 밑야요. 우리에겐 잡아먹을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 위에는 우리를 잡으려는 무엇이 세 층이나 있어요"라고 말한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우리를 잡으려는 무엇이 세 층 '밖에' 안 되었던 이 시절이 나았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그 층을 더 세분화시키기 위해 발악하고 있는 세상 아닌가.
저자의 말마따나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신기루처럼 잠깐 보였다 사라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벽화가 꾸며진다고 해서 그 가난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고, 찰칵찰칵 찍어대는 카메라 렌즈 정도로 담길 수 없는 무거운 삶의 무게가 있다.
저자는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가난이 머무는 집을 더 다독이며 챙겨야 한다고 말한다. 사라진 공동체성을 꺼내보자는 이야기인 것 같다. 아무리 먹이 피라미드가 세분화되어도 어쨌든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아니지 않나.
가난이 사는 집 - 판자촌의 삶과 죽음
김수현 (지은이),
오월의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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