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치전적지보존회가 '제1방어 진지' 표지판을 웅치 전적지 1.7km, 창렬사 470m 지점에 세워 두었다. 이곳은 황박 의병장이 주둔했던 곳이다.
정만진
윗글은 전북 진안군 부귀면 옛웅치길 147 '창렬사' 외삼문 왼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전문이다. 창렬사는 1592년 8월 13~14일 이틀 동안 1만여 침략군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한 1천여 아군의 영령들을 추모하고 현창하기 위해 건립된 제향 공간이다. 그래서 외삼문에 모충문(慕忠門), 사당에 창렬사(彰烈祠) 현판이 걸려 있다.
안내판의 "이곳은 임진왜란 때 호남을 지켜냄으로써 나라를 지켜낸 전투로 평가되는 웅치 전적지의 한복판이다"라는 첫 문단은 1592년 8월 13~14일 당시 웅치 전투가 창렬사로 들어가는 계곡 입구, 이곳 창렬사 주위, 창렬사 뒤편 고개 정상부까지 세 곳에서 전개됐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왜군은 조선 전역을 거의 장악한 뒤 호남 공략을 위해 금산에서 1만여 명의 병력으로 용담, 진안을 거쳐 전주성을 공략하고자 했다"라는 둘째 문단은 일본군의 침략 경로와 목적을 말해준다.
전라도 곡창지대를 빼앗기면 안 되는 까닭
왜적은 전라도 곡창지대를 빼앗아 배불리 먹으면서 여유롭게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심산이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1592년 8월 13~14일 이틀간 전주 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해남현감 변응정과 함께 진안 출신 창의사 김수와 그 동생 김정 등의 의병이 연합하여 이곳 웅치에서 죽기로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와 중과부적으로 김제군수 정담과 김수, 김정 등을 포함하여 상당수 장렬히 전사"하였던 것이다.
웅치를 넘은 일본군은 이제 활개를 치며 전주성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적은 "웅치전에서 막대한 전력의 손실을 입었기에 전주성을 제대로 공략도 못해보고 패주하고 말았다. 이에 웅치전은 곡창 호남을 지켜내고 국가를 지켜낸 사실상 대첩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상 대첩"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일본군은 웅치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빌미가 되어 전주 공성전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웅치전투에서 순국한 1천여 영령들의 희생이 전주성 함락을 막아내는 핵심 밑거름이 된 것이다. 비록 웅치에서는 목숨을 바치고도 졌지만, 궁극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므로 "사실상"은 "대첩"으로 평가받을 만하다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