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곧 제 인생과 마찬가지예요. 가정을 건사하며 느꼈던 행복과 희열뿐만 아니라 분노 같은 모든 감정이 곧 지금의 작품이 된 거죠."
월간 옥이네
선한 행복이 싹을 틔웠다
"20대 초반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고 나니, 삶에 관한 질문이 생기더군요.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며 살 것인가 혹은 평범하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었죠. 이건 제가 사춘기 시절 헤르만 헤세의 <지성과 사랑>을 읽으면서 오랜 시간 품어온 생각이기도 했어요. 오랜 고찰 끝에 그 답을 내리기로 했죠. 자식이 생겼으니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살자고요."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날 무렵 미술을 향한 열정이 삶의 문을 다시금 두드렸다. 열정에 응답하듯 하루하루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로 그림을 그렸다. 학점은행제 학부 과정과 치열한 그림 수업으로 하루치 체력을 모두 소진하고 나면 파르르 손이 떨려왔다. 그래도 다음날이면 '다시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솟았다. 그야말로 미술에 모든 열심을 쏟아 붓던 때다. 주변에서 그의 건강을 염려하며 말릴 정도였다니 말이다.
"공정하고 따뜻한 할머니가 되자. 제 20대 시절 목표였어요. 22살 이른 나이에 결혼했고, 삶의 풍파를 몇 차례 겪으며 20대 시절부터 빨리 나이가 들어 40대가 되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그쯤이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한편으론 그 나이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이미 그 꿈을 이뤘지요.
미술 공부는 늦게 시작했어요. 마흔여섯쯤에요. 그림을 그리면서는 지금 미술을 만난 것을 운명이라 여겼고, 그간 돌보지 못했던 억눌린 마음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어요. 아이들을 키울 땐 느끼지 못했던 에너지였어요."
서양화 전공으로 석사과정에 진학해 설치미술을 접하면서 그는 미술이 운명이자 최선의 삶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대구에서 학교가 위치한 대전까지 끼니 챙기듯 꼬박꼬박 통학길에 올랐다. 밤이면 쓰러질 것처럼 힘들어도 학교 가는 길에 차오르는 새로운 에너지가 하루를 비췄다. 흩어져 존재하던 인생의 사건이 작품 안에서 마치 하나의 퍼즐처럼 맞춰지는 듯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을 아우르는 가정과 행복, 전통과 같은 중요한 주제들도 이때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학원 첫 과제 주제가 작품 속에 자신을 반영해 표현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때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을 돌아보게 됐죠. 너무 슬프더라고요. 잠도 이루지 못하고, 며칠을 눈물로 보냈어요. 몇십 년에 걸쳐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딱딱해진 분노와 악한 감정들을 녹이는 과정이었죠."
그 자리에 새로운 씨앗처럼 떠오른 건 생각지 못한 복주머니였다. 분노의 끝에는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건사해온 어머니라는 자각, 그리고 행복을 원하는 선한 마음이 있던 것이다.
"커다란 숟가락에 직접 만든 수천 개의 복주머니를 담은 작품을 만들었어요. 역사적으로 '엄마'란 존재는 결국 사람을 먹이는 존재이고, 먹이는 마음의 이유에는 '행복'을 염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 거죠. 수천 개의 복주머니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가족의 소중함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제게 소중한 존재이고 또 삶의 주제이죠."
장세록 작가의 새로울 '새로'
"가정은 곧 제 인생과 마찬가지예요. 가정을 건사하며 느꼈던 행복과 희열뿐만 아니라 분노 같은 모든 감정이 곧 지금의 작품이 된 거죠.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작은 단위 중 하나이고, 현대 사회에서는 점차 그 형태도 확대되고 있지요. 저는 가정 문제를 해결하면 많은 사회문제도 덩달아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는 또 있다. 전통적인 감각이 물씬 느껴지는 복주머니, 그리고 조각보다. 손수 만든 수천 개의 복주머니를 숟가락에 얹어진 밥알로 은유하는가 하면 집을 형상화한 벽면에 걸거나, 촘촘히 못질한 벽과 천장에 매달기도 하고 전시를 찾는 관람객과 함께 나누기도 한다. 장세록 작가에게 행복이란 의미를 지닌 이 복주머니는 마을 주민들의 집 곳곳에도 전해진다.
조각보 역시 장세록 작가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작품이다. 조각보는 물건을 싸거나 밥상을 덮는 도구일 뿐 아니라 전통 공예의 한 분야로 한국을 대표하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은 세련된 배치를 중시하기도 했는데, 그에 비해 한국의 조각보는 근본적인 역할에 비춰 순수함과 소박함이 강조되기도 한다고. 장세록 작가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런 특징이다.
"조각보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여성들의 일상예술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요. 나아가 조화와 화합, 운명 같은 것을 은유하기도 하니 가정 혹은 가족과도 그 주제가 맞닿아 있지요.저 역시 이런 조각보의 아름다움에 빠져 작품을 만들고 있고, 올해 3월에는 예술공간 안남에서 제가 만든 조각보를 주제로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