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이항증
이상룡은 만주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부민단과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하면서 동포사회의 여러 가지 사정을 알고 있었다. 외교력을 통해 중국과의 큰 문제는 풀렸으나 곳곳에서 한인들은 어려운 처지에서 고투하고 있었다. 마적떼에 희생되거나 납치당한, 그리고 재물을 빼앗긴 일도 벌어졌다.
그는 1914년 〇월 〇일 〈남만주에 교거하는 동포들에게 공경히 고하는 글(敬告南滿州僑居同胞文)〉을 지어 힘겹게 살아가는 동포·학생들을 위로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았다. 이 글을 남만주지역 한인학교를 통해 보내면서 고통을 극복하며 조국독립을 위해 더욱 단결하고 힘을 모을 것을 청한다.
이 시기 그의 신념과 철학, 동포사랑 정신이 오롯이 담긴 매우 주요한 문건이어서 전문을 세 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단조(기원 4246년 계축년(1913) 〇월 〇일에 어리석은 아우 석주는 눈물로 붓을 적시면서 남만주에 이주하신 동포 형제들에게 공경히 한 말씀을 올립니다. 제가 일찍이 신문에 실린 인구조사 기록을 보았는데 봉천성 내의 각 지방에 교거하는 한인의 실수(實數)가 28만 6천 여인이 넉넉하였습니다. 거주지의 원근이나 친면(親面)의 유무를 막론하고 이 많은 한인들 중 누군들 같은 우리의 동포가 아니겠습니까? 슬픔에 겨워 말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아아. 제군들이여! 이국의 산천이니 낙토가 아닐 것이요. 만리(萬里)의 노정(路程)이니 근린(近鄰)이 아닐 것입니다. 친척을 이별하고 분묘를 버린 채,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이 땅으로 건너왔습니다. 다소의 금전은 노상에서 모두 허비하였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역인의 토지와 방(房)을 조차하여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움직여도 입에 풀칠하기에 부족하니, 그 구차함과 쓰라림은 피차간에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2~3년 이래로 압록강을 건너는 자가 날로 더욱 증가하여 마치 시장으로 돌아가듯이 하니,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 심정은 대개 "촘촘한 그물 속의 물고기는 도망쳐 벗어나는 것이 좋은 계책이고, 불타는 숲의 새는 날아가 버리는 것이 옳은 계책이다. 더구나 이 만주는 단조의 유허이고 고구려의 옛 강역이니, 우리들이 몸을 편안히 하고 목숨을 보존할 땅으로 이곳을 두고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그래서 희망을 양식으로 삼고 곤경을 기반으로 삼아 온갖 풍상을 무릅쓰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군이 그 땅을 버리고 온 것은 지려(志慮)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용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편안히 하고 목숨을 보존하는 것은 절로 도리가 있으나, 결코 이 지역으로 건너온 것을 가지고 선뜻 마침내 행복을 얻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