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밭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
독립기념관
이상룡은 신식무기를 입수하고 조직을 확대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고향에서 아들이 가져온 자금은 무기구입으로 대부분 사용하였다. 본격적인 항일전을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했다.
서로군정서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족회가 중심이 되어 그 관할구역인 유하현·화룡현·통화현·관전현 등지의 한인들에게 1호당 1원 5각의 군자금을 부과하였는데, 그 호수는 1만여 호에 이르렀다. 이밖에 지리적으로 인접한 평안도지역, 서로군정서 지도부와 연고가 있던 경상도 등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자금을 모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 10)
선전활동도 활발히 벌였다. 주2회 발행하는 기관지 <새배달>은 순한글신문으로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를 비롯하여 교민사회의 정보와 항일투지를 담는 논설을 실었다. 서로군정서의 중점사업은 신흥무관학교를 통한 우수한 독립군의 교육·훈련이었다.
서로군정서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독립군양성의 근간을 확립하기 위한 신흥무관학교의 운영과 확대였다. 서로군정서에는 3.1운동 이후 늘어나는 애국청년들을 수용하고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근대적인 군사교육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5월 7일 신흥강습소를 출발로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군사교육을 시작했다.
초기의 학생은 최소한 40명 정도였으며, 음력 12월 18일에 연종시험과 진급포상회가 개최되어 본과 학생 중 반장과 우등자 5명, 소학과 학생 중 반장과 우등자 4명이 포상을 받았다. 이후 신흥강습소는 1913년 5월 새로운 교사를 갖추고 교명도 신흥중학으로 변경하였으며,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등 독립군 양성의 요람이었다. (주석 11)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의 총재 또는 독판의 위치에서 15차례 걸쳐 대원들을 국내에 진공시켜 게릴라전으로 일제를 타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