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10일) 신촌에서 열린 서길수 교수의 '80살 삶을 기리는 네번째 보정 서길수 교수 출판기념회와 살아서 하는 장례식'에서 참석자들에게 이야기하는 서길수 교수 모습
오문수
지난 10일 오후 4시, 신촌 로터리 부근 '거구장 식당'에서는 서길수 교수의 '80살 삶을 기리며 51명 에스페란티스토가 쓴 <인류인 서길수> 출판기념회와 함께 '살아서 하는 장례식'이 열렸다. 식장에는 전국에서 온 서길수 교수 지인 60여 명이 참석했다.
올해 80세가 된 서길수 교수는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경제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제대학(현 서경대) 교수로 퇴직한 그는 1994년 (사)고구리연구회를 창립해 회장과 이사장직을 맡았다. 현재는 고구려 고구리연구소 이사장과 고구려발해학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며 30여 권의 저서를 출판하고 10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서길수 교수의 '살아서 하는 장례식'은 이번이 네 번째이다.
에스페란토 운동가, 발로 뛰는 역사전문가, 여행가, 구도자
서길수 교수는 남다른 이력을 지닌 선구자이다. 에스페란토에 대한 홍보, 조직, 교육, 저술 등을 통해 우리나라 에스페란토 운동의 전국화에 앞장섰고 국제적으로도 넓게 활동해 한국의 위상을 높인 열정적 에스페란토 운동가이다.
1980년대 한국인이 절대로 입국할 수 없는 3국은 북한, 쿠바, 알바니아다. 그러나 서길수 교수는 1988년 어렵게 쿠바를 방문했고, 세계 에스페란토 임원으로 1990년 쿠바 아바나 세계대회에서 카스트로와 나란히 단상에 앉았으며 대통령궁에 초대받아 카스트로를 만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서길수 교수는 1968년 대만 베트남 방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40국 이상을 누비고 다녔다. 에스페란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에스페란토를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다.
서길수 박사는 발로 뛰는 역사가이다. 그의 박사논문은 한국 경제사이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고구리(高句麗)산성 연구를 통해서였다. 그는 중국과 수교하기 전부터 20년 이상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만주와 몽골을 발로 뛰면서 131개의 '고구리' 성을 답사하며 고구리 산성 연구의 개척자가 되었다.
1994년 경복궁 민속박물관에서 '고구리 특별대전'을 열어 고구리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서길수 박사는 고구리 연구를 통하여 '高句麗'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로 소리내야 함을 밝혀냈다. 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 논리를 개발하고 중국이 고구리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역사 침탈의 실상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고구려를 왜 고구리라고 부릅니까?"라고 묻자, "'고구려'가 아닌 '고구리'여야 한다"고 설명한 그는 "옥편에 보면 '려(麗)를 나라이름 '리'로 읽어라'라고 씌어 있으며 용비어천가에도 '리'로 읽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서길수 교수의 삶은 여행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대학 1학년 때 28일간 전국 무전여행을 했던 그는 80세가 다 되어 부인, 손주들과 함께 수소차로 전국 섬과 일본 종주를 했다.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는 거리를 여행한 그가 쓴 여행 관련 책만 6권이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