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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살 서길수 교수의 네 번째 '살아서 하는 장례식'

2019년부터 공개적으로 장례의 내용과 절차 당부

등록 2023.06.14 09:17수정 2023.06.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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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토요일(10일) 신촌에서 열린 서길수 교수의 '80살 삶을 기리는 네번째 보정 서길수 교수 출판기념회와 살아서 하는 장례식'에서 참석자들에게 이야기하는 서길수 교수 모습

지난 토요일(10일) 신촌에서 열린 서길수 교수의 '80살 삶을 기리는 네번째 보정 서길수 교수 출판기념회와 살아서 하는 장례식'에서 참석자들에게 이야기하는 서길수 교수 모습 ⓒ 오문수


지난 10일 오후 4시, 신촌 로터리 부근 '거구장 식당'에서는 서길수 교수의 '80살 삶을 기리며 51명 에스페란티스토가 쓴 <인류인 서길수> 출판기념회와 함께 '살아서 하는 장례식'이 열렸다. 식장에는 전국에서 온 서길수 교수 지인 60여 명이 참석했다.


올해 80세가 된 서길수 교수는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경제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제대학(현 서경대) 교수로 퇴직한 그는 1994년 (사)고구리연구회를 창립해 회장과 이사장직을 맡았다. 현재는 고구려 고구리연구소 이사장과 고구려발해학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며 30여 권의 저서를 출판하고  10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서길수 교수의 '살아서 하는 장례식'은 이번이 네 번째이다.

에스페란토 운동가, 발로 뛰는 역사전문가, 여행가, 구도자

서길수 교수는 남다른 이력을 지닌 선구자이다. 에스페란토에 대한 홍보, 조직, 교육, 저술 등을 통해 우리나라 에스페란토 운동의 전국화에 앞장섰고 국제적으로도 넓게 활동해 한국의 위상을 높인 열정적 에스페란토 운동가이다.

1980년대 한국인이 절대로 입국할 수 없는 3국은 북한, 쿠바, 알바니아다. 그러나 서길수 교수는 1988년 어렵게 쿠바를 방문했고, 세계 에스페란토 임원으로 1990년 쿠바 아바나 세계대회에서 카스트로와 나란히 단상에 앉았으며 대통령궁에 초대받아 카스트로를 만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서길수 교수는 1968년 대만 베트남 방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40국 이상을 누비고 다녔다. 에스페란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에스페란토를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다.


서길수 박사는 발로 뛰는 역사가이다. 그의 박사논문은 한국 경제사이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고구리(高句麗)산성 연구를 통해서였다. 그는 중국과 수교하기 전부터 20년 이상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만주와 몽골을 발로 뛰면서 131개의 '고구리' 성을 답사하며 고구리 산성 연구의 개척자가 되었다.

1994년 경복궁 민속박물관에서 '고구리 특별대전'을 열어 고구리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서길수 박사는 고구리 연구를 통하여 '高句麗'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로 소리내야 함을 밝혀냈다. 그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 논리를 개발하고 중국이 고구리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역사 침탈의 실상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고구려를 왜 고구리라고 부릅니까?"라고 묻자, "'고구려'가 아닌 '고구리'여야 한다"고 설명한 그는 "옥편에 보면 '려(麗)를 나라이름 '리'로 읽어라'라고 씌어 있으며 용비어천가에도 '리'로 읽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서길수 교수의 삶은 여행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대학 1학년 때 28일간 전국 무전여행을 했던 그는 80세가 다 되어 부인, 손주들과 함께 수소차로 전국 섬과 일본 종주를 했다.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는 거리를 여행한 그가 쓴 여행 관련 책만 6권이나 된다.
  
a  서길수 교수의 '살아서 하는 장례식' 행사장 모습

서길수 교수의 '살아서 하는 장례식' 행사장 모습 ⓒ 오문수


그는 2009년 정년퇴임하고 산사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고 2012년에 하산해 불교 공부와 집필에 전념했다. 불교 공부를 마친 그는 식사도 철저한 채식을 실천하여 '만(卍)'자 탐구 세계여행을 하면서도 어디에 가든지 '남새(채소)'와 과일만으로 식사를 했다. 그래서일까? 서길수 교수가 행사 참석자들에게 제공한 음식에는 고기가 한 점도 없었다.

서길수 교수의 '살아서 하는 장례식'

그가 늘 마음속에 죽음을 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자식들에게 남길 유언을 준비하면서 장례식을 생각했다.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죽어서 누가 오는지도 모르는 장례식보다는 내가 살아서 조문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장례식이 좋겠다. 그러려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겠다. 그 대신 죽을 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만 참석하는 장례식을 해야겠다"며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열었다.

2019년 12월 21일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한다는 초청장을 받은 지인들은 황당해했다. 심지어 친한 친구 한 명은 "네가 관속에 들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 안 가겠다"고 말한 후 불참했다.

서길수 교수는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본인이 어떻게 삶을 마감할 것인지와 가족들에게 부탁하는 장례의 내용과 절차를 미리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자신이 출판한 저서를 제공하고 식사도 무료로 제공했다.

"행사장에 꽃을 가져오려면 생명을 꺾어야 합니다. 때문에 꽃을 가져오시거나 금일봉을 가져오실 분은 오지마세요. 금일봉을 가져오시면 제가 갚아야 할 부채가 생깁니다."

서길수 교수가 "인생도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거의 같다"며 사람의 삶을 자연의 사계절에 견주어 이야기했다.
 
a  서길수 교수의 네번째  '살아서 하는 장례식' 에 참석한 분들이 기념촬영했다.

서길수 교수의 네번째 '살아서 하는 장례식' 에 참석한 분들이 기념촬영했다. ⓒ 오문수

 
"사람의 삶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철이 있어요. 봄에는 학교 다니며 공부할 때이고 여름에는 직업을 가지고 활동할 때입니다. 가을에는 열심히 활동해 성공하고 거두는 때이며 겨울은 거둔 것을 나누고(回向) 죽음을 준비할 때(宗教)입니다. 잘 죽는 것이 더 중요하며 철학이 끝나는 곳에 종교가 시작된다는 철학자 하이데커의 말을 좋아합니다. 이걸 모르는 걸 '철부지(철不知)'라고 합니다."

행사장을 빠져나오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E. 프랭클의 글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죽음을 바라봄으로써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삶을 풍실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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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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