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10일 항쟁 국민대회. 시위대가 광화문을 향해 행진하며 데모를 벌이자 전경들이 페퍼포그를 발사, 해산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1987년 대항쟁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하는 일이었다. 역사연구자들은 한 장의 성명서를 보고 투쟁을 주도하는 세력의 정치 성향과 투쟁 전술을 분석했으나, 유인물의 제작과 배포를 천직으로 삼았던 나는 좀 다르다.
1천 장 내외의 유인물이라면 등사기로 찍는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들, 나병식과 김병곤 등은 등사기로 성명서를 찍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에서 윤상원은 등사기로 투사회보를 찍었다.
하지만 나는 6월 항쟁에서 유인물을 1만 장씩 찍었다. 1만 장은 등사기로 찍을 수 없다. 인쇄기로 찍는다. 이때 '고양의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이냐?'는 운명적 난제가 제기된다. 누가 인쇄소를 섭외할 것이며, 누가 인쇄비를 조달할 것이냐? 어림잡아 아파트 한 채에 달하는 비용이 내 호주머니에서 나갔다.
유인물이 1천 장 내외라면 날쌘돌이 두세 명이 하룻밤이면 배포할 수 있다. 그런데 유인물이 1만 장 내외라면 상황이 다르다. 조직력이 전제되지 않고선, 대량의 유인물을 찍을 수도 없거니와 배포할 수도 없다.
지난 12월 3일 시내 각 학교에는 '조선학생청년대중아 궐기하라'는 격문 수천 매가 배부되었다. 그 배부의 방법이 극히 교묘하여 책상마다 서랍 속에 격문을 넣어 두었다. 격문 작성과 인쇄, 배부의 주범은 장석천 등 10여 명이었다.
배부된 격문은 장석천 등이 사흘 동안 2만 장을 찍어, 그중 수천 매는 시내에 배부하고, 나머지는 평양 대구 등 지방으로 발송하였다. - <동아일보> 1929.12.28 호외
지난 칼럼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 장석천 선생이었다는 것, 이 분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전파했다는 것, 이 분이 격문을 제작하고, 배포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관련 기사: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댕기머리' 사건으로 일어났다? https://omn.kr/24ce6)
"우리들 선혈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조선의 이익을 위하여 항쟁적 전투에 바쳐라. 단결하여 궐기하라. 광주를 성원하라. 이후의 역사는 우리들의 것이 아니냐."
이 얼마나 심장을 뛰게 하는 선동이냐? 삼천리가 찍도 못하던 압제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본디 우리의 것이며, 2천 만 조선인이 단결하면 우리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다는 거다. '해방이 바로 옆 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잖아?' 나는 지금까지 이처럼 명쾌한 혁명적 낙관주의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면 안 될 것이 있다. 장석천 선생이 제작하고 배포한 유인물의 수가 2만 장이었다는 거다.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교실의 책상 속에 교묘하게 배포했다. 장석천 선생이 홍길동의 도술이라도 부렸다는 건가?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는 장석천 선생의 행적은 일본 관헌이 작성한 신문조서에 토대한 것임을 전제해야 한다. 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관헌과 투사는 피 말리는 머리싸움을 한다. 관헌은 범법자를 가능한 많이 잡아내려고 취조하는 것이고, 투사는 동지들을 가능한 적게 축소하고자 한다. 그래서 사건을 혼자 뒤집어쓴다. 동지를 보호하기 위해 독박을 쓰는 것이다.
유인물 제작과 배포에 대해 독박 쓴 장석천 선생이었지만 배후 조직에 대해서만큼은 감출 수 없었나 보다. 일본 경찰은 비밀결사 관련 사실에 대해 추궁했다. 아마도 이 장면에서 살인적인 고문이 자행되었을 것이다.
서훈받지 못한 독립유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