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길정씨가 차고 있던 배지. '원하청 노동자 함께 싸우자'고 적혀 있다.
김성욱
- 노동자들에게 20억원을 배상하라며 사측 손을 들었던 1·2심과 달리, 최근 대법원이 이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한 결과였지만 덤덤했다. 13년이나 걸렸다. 그동안 사법부는 철저히 자본 편이었다. 20년 넘게 불법파견을 한 현대차에게 지난 5월 처음으로 3000만원 벌금형이 떨어졌다. 현대차는 뻔히 불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비정규직을 썼다. 계산하면 그게 훨씬 이익이니까. 그런데 그 큰 기업에 고작 3000만원? 만약 노동자가 불법이라는 걸 알고 라인을 점거했다면 어떻게 되나? 최소 집행유예, 징역형이다. 나도 두 번(2006, 2016년) 구속됐다. 사법부에는 기대도 없었다."
- 대법원이 개별 노동자마다 파업에 대한 손배 책임을 구별해야 한다는 새로운 판단을 내놨다.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파업이 '불법'이라는 판단에는 변함 없는 것 아닌가. 대법원이 불법파견이라고 해서 노동자들이 회사에 불법을 시정하라고 요구했건만 사측이 말을 안 듣고 버텼다. 어쩔 수 없이 파업했더니 하청은 원청에 파업할 수 없다고 '불법' 딱지를 붙였다. 13년이 지나도 똑같이 '불법'이란다. 이게 말이 되나? 이번 판결로 뭐가 얼마나 달라질까?"
- 2010년 파업 당시 정규직이었다.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비정규직 파업에 왜 함께 했나.
"현대자동차비정규직 노조가 생기기 전 공장을 돌며 점심이나 저녁시간, 휴식시간 때 왜 노조가 필요한지 설명하고 다녔다.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데 차별 받으면 안 된다' '여러분이 바로 서야 현장이 바뀐다'고 말했다. 내가 해놓은 말을 지켜야 했다. 나는 비정규직 투쟁을 '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더 배웠다.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 현대자동차 노조를 비롯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한다.
"잃을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현대차도 노사 담합 구조가 이미 오래 굳어진 상태다. 그나마 싸움을 이어가고 공장을 바꿔가고 있는 건 비정규직들이다. 그들은 이제 3중으로 싸워야 한다. 원청 자본, 하청 자본, 그리고 정규직 노조까지.
지난 10년여 동안 현대차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특별채용된 인원이 9000명이 넘는다. 이들도 조용하다. 처음엔 '10년 싸웠으니 피로가 누적됐겠지' 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연대의 흐름이 생길 거라고 봤다. 아니었다. 모두 회사에 흡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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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억 손배를 안고 10년 넘게 살았다.
"차라리 형사처벌 받는 게 낫다. 그래 봤자 경찰서 가서 조사받고, 빨간 줄 그어지고, 심하면 구속밖에 더 되나. 근데 손배는 아니다. 한번은 통장이 가압류됐더라. 은행에 갔더니 통장이 묶여있다는 거다. 고작 몇백만 원 들어있던 통장에 회사가 3억을 묶어놨다. 손배는 내 선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가족들 인생까지 영향을 준다. 그래서 노조활동 하는 사람들은 동산이든 부동산이든 자기 이름으로 잘 못한다. 언제 가압류 잡힐지 모르니까.
집으로 무서운 등기들이 쉼 없이 날아온다. 가족들에게 '나를 찾는 등기가 오면 대신 받지 말라'고 했더니 한번은 현관문에 우체부가 남긴 '부재중' 딱지 5~6개가 한꺼번에 붙었더라. 몇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문에 스티커 자국들이 남아있다. 20억이든 200억이든 내가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닐 뿐더러, 갚아 마땅한 돈도 아니다. 그 굴레에 마음 한켠이 늘 무거웠지만, 애써 무시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 지난 2014년 해고됐다. 그간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나.
"라인을 세우고 파업을 했던 것 등이 '업무방해'라고 해고됐다.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차노조에서 생계비를 지급해왔다. 벌써 해고 10년 차다. 최장 기간 해고 기록이다. 처음 해고됐을 땐 이렇게 오래 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직도 회사에서 피켓 들고 복직 요구를 하고 있다. 현재 현대차지부에서 나처럼 생계를 지원하는 해고자는 총 4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