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작’이 될 ‘대가리 박아’ 작업장.
최방식
'대가리 박아' 테마작품은 그의 '인생작'이 될까? 작업실 귀퉁이 하얀 칠판에 조그맣게 끄적인 '베니스 비엔날레'가 눈에 들어온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겸연쩍어 하며 조각가라면 선망하는 전시회란다. 초대 작가의 꿈. 테마작이 공개되는 날, 그 꿈을 이룰까?
절망과 불안을 묘사했지만 카타르시스가 있는 작품. 노르웨이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 뭉크가 피오르드 해안 한가운데 그려넣은 '절규'가 떠오른다. 불안한 존재를 고민하던 어느 날 해질녘 암청색 도시에 울려퍼진 커다란 비명을 그는 슬프게도 그렸다. '슬픈 음악'의 대명사라는 비탈리(이탈리아)의 '샤콘느'(G단조, 18세기 초)를 들으며 완성하지 않았을까.
조각가가 된 계기를 궁금해 하자, 어린 시절을 소환한다. 찰흙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만들던 기억. 남편을 먼저 보내고(교통사고) 홀로 농사지으며 아들딸을 키운 여인(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공부에 열중했던 중고 시절. 열심히 하면 돈 잘 벌고 예쁜 아내도 얻을 수 있다던 어릴적 만화 내용까지.
"중3 담임이 창원기계공고를 추천해 입학했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2학년 땐 전교 10위권에 들 정도였죠. 근데, 엄마한테 자랑하려고 하는 공부가 싫어졌어요. 그 때 미술이 눈에 들어온 거죠. 자동차 디자인을 배우러 컴퓨터그래픽 학원에 갔는데 형님들이 고흐·고갱 논쟁을 벌이는 데 정말 멋있어 보였거든요. 그림만 잘 그리면 되는 줄 알았어요."
미술을 하려면 미술대학에 가는 게 좋다는 걸 뒤 늦게 알았고, 그제야 다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몇 개월의 벼락공부 끝에 국립창원대 미대(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고성(경남) 시골 마을에 첫 대학생이 나왔다고 시끌벅적했고 엄마가 좋아라했던 걸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성적이었던 그가 과대표를 맡았고 학우들의 부러움을 사는 모범생이 됐다. 늘 도서관에 살며 국내외 미술잡지를 탐독했고 미술흐름을 파악하는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취업하면 끝인데 뭐 그리 열심히 하느냐'는 타박에도 졸업전시회를 성대하게 꾸몄고 결국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같은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전공은 서양화 아닌 조각. 그리고 작업실을 고성 고향 밭 컨테이너에 차렸다. 그때 5번에 걸친 대한민국미술대전에 도전, 최우수상('인생의 추상성' 작품명)을 따냈다. 대학이 발칵 뒤집혔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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