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어린이(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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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책장을 열면, 빼곡히 작은 글자들이 세로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빈집에 홀로 친구도 놀러 오지 않는 날에는 새 방에 엎드려 대문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갔다. 중간에 모르는 한자가 섞여 있고 <용비어천가>에서나 볼 법한 글씨들이 간혹 꼬부랑거렸지만, 황홀했다.
실은 거짓말이다. <죄와 벌>은 읽다가 덮었고 <전쟁과 평화>는 보다가 졸았다.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전전하다, 이야기들은 끝내 내 것이 되지 못했다.
그때 난 고작 여덟 살이었다. 역시 무리였다. 어려운 책은 냅다 뒤로 던지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그네를 탔다. 좁은 논두렁으로 다니며 메뚜기를 잡다가 동네 친구들과 나무를 탔다. 산에 가서 총싸움 놀이를 하다 인근 하천인 남대천으로 나갔다. 강을 건너며 놀다가 물살에 신발 한 짝이 둥둥 떠내려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발 잃어버리고 늦게 들어온 벌로 저녁밥을 굶었다. 새 방에 들어가 눈물을 닦으며 두꺼운 책을 펼쳤다. 줄 잘 선 군대마냥 열병식에 익숙한 글자들은 위로엔 젬병이었다. 대신 느린 걸음으로 자장가를 불러주었지만.
그 시절 가족 중 누군가 책 읽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즐겁게 책을 읽었다. 그런 풍경 속에서 산 덕분에 지금 우리 집 책장에도 책이 가득 있고 책을 가까이 두고 즐겨 읽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 읽지 못해도, 군데군데 읽어도, 한 부분만 읽거나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책이 있어도. 시나브로 책은 나에게 친밀하고도 가까운 무엇이 되어주었다.
반면에 우리 아이들은 디지털 세상, 스마트폰이 우리의 눈과 귀를 빼앗아간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다. 거실엔 대형 디지털 텔레비전이 있고 각자 개인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바쁘다, 매일 학원으로 야간자율학습으로 과제로. 아파트 숲에 사는 아이들은 원하는 친구 집에 자유롭게 드나들기도 어렵다. 틈이 나면 인터넷,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게 더 빠르고 편리하다.
무료할 틈은 없고 부모의 잔소리만 듣는다. 잔소리하지 말라는데, 아이들을 그냥 이렇게 둬도 괜찮을까. 여전히 책은 아이들 가까운 곳에 있지만, 시선을 빼앗겼으니 어쩌나. 책이 아이들에게 의미가 되어줄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싶다는 고민이 깊어질 즈음 책 <소설처럼>을 만났다.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은 강압적 독서교육을 비판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말하는 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