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km당 배출량가솔린 차량의 탑승 인원은 1.5명으로 계산했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평균 탑승 인원 값은 이보다 낮으며 수도권은 1에 거의 근접한다
전현우
나쁜 소식만 전할 수야 없다. 좋은 소식 역시 두 가지 있다. 한국철도의 평균 승객은 량당 6명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열차 종류별로 다르지만, 30~50명/량 정도. 이렇게 되면 1인당 탄소 배출량은 1/5에서 1/10 사이다.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이라면, 철도가 도시, 특히 도시의 핵심부와 그 어느 교통수단보다 밀접한 관계라는 사실이다. 도시철도나 광역철도 역보다 좋은 중심지는 없다. 실제 순항속도는 느린 고속철도가 항공기와 경쟁할 수 있는 것도 역이 도심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역 접근성에 기반해 도심을 만드는 건 분명 지금도 통하는 이야기다. 이 도심을 활용하기 위한 통행이 100% 철도, 대중교통, 자전거, 그리고 역 주변에서의 걷기로 이뤄진다고 해보자. 이 지역의 이동에서 나오는 탄소 배출은 최대 90%까지 줄어들 것이다. 전기 에너지의 원천이 지금과 동일하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런 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재생 에너지를 쓰더라도 이로 인한 갈등과 토지 소모 역시 비슷하게 줄어들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경우이다. 실제로 탄소중립을 위해 가장 높은 철도수송분담률을 제안한 교통연구원의 한 연구에서도 철도수송분담률 목표치는 47.5%였다.(3) 물론 이는 무시무시한 수치이지만, 뒤집어 보면 결국 자동차가 절반은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값은 철도가 기후 위기 시대의 이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값임에는 틀림없다. 현재 철도수송분담률은 13%(4)이니... 철도 수송을 극적으로 늘리는 일은, 결국 이동과 도시를 포기할 수 없다면 필연에 가깝다.
한국 철도가 풀어야 할 문제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극적으로 철도 분담률을 높일 수 있을까? 그리고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국가의 역할이 제대로 서지 않고서는, 그리고 이 국가의 일을 세밀하게 들여다 볼 시민과 사회의 눈 없이는 한국철도의 미래는 어둡다고 생각한다.
철도사에서 출발해 보자. '마이카 시대'가 한국의 미래로 설정된 이래, 철도는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 고속도로로 교통의 축이 바뀐 1970년대 이래, 지금껏 근 50년 내내 적자를 본 한국철도. 자체 수익으로 영업비용도 낼 수 없었다는 뜻이고, 미래를 위한 투자는 더더욱 엄두도 낼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을 뒤집어 지금처럼 철도에 다시 숨통을 불어넣었던 것은 결국 국가였다. 1990년대 이후 철도 투자는 점차 늘었고, 그 대부분은 결국 국가가 재정으로 책임졌다. 고속철도, 광역철도, 도시철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철도를 버리기보다는 계속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국가의 판단이었고, 이 판단은 국가의 재정 역량에 기반해 있었다.
이런 일들은 기후 위기와는 별 관련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에 국가의 역할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공간의 관리자로서 국가의 역할은 대체할 수 없다. 자동차 교통을 관리하려면 공간 활용 방법도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도역 주변의 지구단위 개발은 기본이다. 철도 축과 도시 축을 일치시켜 난개발을 억제하지 않으면, 자동차 없이는 도시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재분배부터 건강 증진까지, 국가는 철도망을 축으로 하는 대중교통망을 활용해 다른 많은 역할도 해야 한다. 교통과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 국가는 철도를 활용해 사람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내야만 한다.
현재 국가가 철도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다른 분야보다도 철도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는 생각 역시 굳건한 것 같다. 그러나 그 투자의 목표 자체는 논란 속에 있다. 이 투자는, 한국철도를 기후 위기 때문에 위태롭고 소외될 수 있는 사람까지도 모두 태울 수 있는 공공성의 열차가 달릴 길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경부선 등 수익 노선과 서울 중심의 망이 되어 경영상 효율이 부족한 부분은 점차 버려 나가는 비정한 길로 만들고 말 것인가? 의구심 어린 눈으로 철도와 정부를 지켜보는 많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