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달성토성)에서 열린 광복회 결성 108주년 기념 행사
정만진
아무도 만나지 않던 우재룡이었지만 박상진의 만남 신청에는 응했다. 우재룡이 박상진에 호의를 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젊은 나이에 의병활동으로 무기징역을 살다가 나온 우재룡의 명성도 대단했지만, 박상진 또한 허위의 수제자로서 이미 명망 높은 거물이었다.
광복회는 1910년대를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마침내 광복회 창립이라는 큰 결실을 맺었다. 1910년대는 망국의 충격과 무단통치의 서슬에 눌려 무장독립운동을 엄두도 못내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5년 8월 25일 나라 방방곡곡에서 달려온 200여 청년들이 대구 달성토성에 결집해 광복회를 결성했다.
그날 이후 박상진과 우재룡은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전라도 지부장 이병호, 만주 지부장 이진룡(2대 김좌진), 지휘장 권영만 등과 함께 애국청년 모집과 만주 파견, 군자금 조달과 전달, 친일파 처단, 일본인 경영 광산 습격, 주재소 공격 등 눈부신 활동으로 "반도의 인심을 뒤흔들었다.(1918년 10월 16일 「매일신보」)"
조선헌병대사령관 고지마 소우지로(兒島次郞)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마치(長谷川好道)에게 "광복회 도당들이 몇 년 동안 조선을 시끄럽게 한 것이 (1919년) 3월 1일 이후 반도 전체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습니다.(『대정8년 조선 소요 사건 상황』) "라고 보고한 것도 광복회의 활약이 당시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고무적 영향을 끼쳤는지 잘 말해준다.
1920년대 의열단 탄생으로 이어진 광복회
1918년 이후 조직이 노출된 광복회는 1차 조직 해체에 직면하지만,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의열단 창단의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는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는 광복회"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오늘 특별전을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광복회의 활동과 독립운동사적 의의에 대해 훨씬 상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전시해준 대구근대역사관 관계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최영 시인이 관람 소감을 밝히고, 이어서 여러 참가자들도 보고 느낀 바를 말했다. 대화는 근대역사관 밖으로 나와서도 계속되었는데, 이때는 우재룡 지사의 장남인 우대현 상임대표의 회고가 주를 이루었다. 참가자들에게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말씀을 듣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