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
이 시리즈에 정도전을 넣느냐를 두고 여러 날 망설였다. 이성계를 꼬드겨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한 대목은 분명 제외대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와 업적은 광대하다.
58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마감한 정도전은 한 개인의 사업, 한 개인의 능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을 하였고, 너무나 많은 재능을 겸비하였다. 초인적이라 할 만큼 건국사업에 혼신의 열과 성을 쏟았다. 그는 지성과 실천력을 겸비한 점에서 다른 이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그러나 많은 만인들에게 혜택을 준 반면에 피해자들로부터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특히 군사개혁과 요동정벌 운동은 권력 경쟁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그는 이 때문에 옳은 길을 가면서도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비명으로 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발자취는 역사를 바꾸어 놓았고, 그가 뿌린 씨는 오래도록 꽃피웠다.(한영우,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조선왕조의 설계자'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홍복판관으로 재직중인 아버지 정운경과 영주 출신의 어머니 우씨 사이에 3남1녀 중 맏이로 아버지 근무지인 개경 또는 외가인 경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신을 두고 오래동안 논란을 일으킨 것은 외가가 승려였다는 것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해 많은 책을 읽고 당시 명망이 높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색의 문하에는 고려 말 명망가인 정몽주·이숭인·이준모·김구용 등이 있었다. 19살이 되던 해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24살에 왕의 비서직에 해당하는 통례문지후로 승진했으나 공민왕이 괴승 신돈을 총애하고 그가 국정을 오로지하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상을 입고 3년 여묘살이를 마칠 무렵 이색이 대사성, 정몽주·이숭인 등 친분이 두터운 분들이 성균관에 입성하면서, 이들의 천거로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시련이 닥쳤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사라지고 외교정책도 바뀌었다. 그는 이를 비판했다가 전라도 나주로 유배되었다. 귀양살이 하는 동안 많은 글을 지었다.
이 무렵 왜구의 침범이 극도에 이르고 국정은 문란하여 나라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 그의 유배는 9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는 국정을 일대 개혁하지 않고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졌다. 그런 어느 날 함흥의 군막으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무공을 세운 장수일 뿐 아직 역성혁명을 꿈꾸고 있지 않았다.
정도전이 이를 부추겼다. 이후 그는 가끔 취중이면 "한고조가 장랑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랑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푸념하였다. 그가 실제 무장의 가슴에 권력욕을 부채질을 한 것인지, 이성계가 권력욕을 갖고 있었는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이성계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을 감행하고 최영 장군을 처단하는 등 쿠데타를 일으켰다. 우왕을 폐위하고 그 아들을 세웠다가 다시 쫓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는 등 민심을 얻으면서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실권은 이성계에게 모아졌다. 핵심 브레인이 된 정도전의 개혁정치가 빛을 발휘했다. 그의 손에는 문관의 역할뿐만 아니라 우군통제사라는 군권까지 맡겨졌다.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1392년 7월 고려왕조를 뒤엎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감행되었다. 군민(軍民)에게 알리는 <편민사목(便民事目)> 17조는 정도전의 작품으로 일종의 '혁명공약'이다. 과거제도, 관혼상제, 역관제도·국둔전의 폐지, 호포(戶布)의 감면·대명률의 준수 등 고려왕조의 적폐를 청산하고 새왕조의 정책을 제시하였다.
정도전은 궁궐·도성문의 이름을 짓고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개혁정치가 과거 유생들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은 비록 군주제이지만 정치적 실권은 신료들에게 나눠주고, 잘못하는 군주는 백성들의 뜻에 따라 방벌할 수 있다는 것, 정치의 근본은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음, 관리는 시험으로 뽑고, 언로를 개방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하며, 이를 위해 간관의 기능을 강화한다는 것, 국왕을 재 교육하고 민의를 듣도록 경연과 구언의 강화책을 제시했다. 또 사대외교를 청산, 자주외교를 내세우며 대마도와 구토회복을 위해 요동정벌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정도전이 설계한 새왕조는 군왕지배체제가 아닌 천하인재 가운데 선발된 재상이 국정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었다. 이것이 절대군주를 꿈꾸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권력욕으로 참변을 당하게 만들었다. 왕조창업의 일등 공신이지만 뼛속까지 권력욕에 가득한 이방원의 칼날에 참수당하고, 둘째 아들도 함께 목이 잘리고 넷째 아들은 자결하였다.
그의 개혁방안이 모두 타당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조에서 불교가 끼친 폐해가 적지 않았지만, <불씨잡변>에 보인 일부 내용과 배불정책은 문제가 많았다. 그럼에도 경자유전의 공전제도(公田制度)와 앞서 소개한 신권정치(臣权政治) 등은 빼어난 수작이었다.
세계적으로 볼 때, 14세기 말~15세기 초의 시점에서 그만한 사상을 가지고 그만한 사회개혁·문명개혁을 성취한 인물이 있는지 의문이다. 아마 비슷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도전이란 인물은 우리의 자산이요, 인류문명의 자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한영우,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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