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성당 입구를 장식한 드예 신부의 사목보고서.
흑산상당
사목보고서가 나온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신유박해(1801년) 당시의 분위기와 약전 약용 형제의 유배 경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조가 승하한 뒤 노론 벽파가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지원을 받아 천주교도를 박해하고 서학(西學)을 일찍 받아들인 남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구(舊) 집권세력인 남인으로서 천주교에 깊숙이 발을 담갔던 약전 약용 형제 집안은 신유박해 태풍에 휘말려 풍비박산이 났다.
프랑스에서 함대를 보내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베이징 주교에게 보낸 백서(帛書) 사건(1801년)의 주모자 황사영은 약전 약용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사위였다.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인 순교자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다. 셋째 형 약종은 배교(背敎)를 거부하고 장남과 함께 처형당해 온 식구가 절멸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애달픈 삶을 살았다.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는 정약현의 딸로 제주 관아의 관비(官婢)가 되어 유배를 갔다. 제주도로 가던 길에 두 살 난 아들(황경한)을 추자도에 내려놓았다. 황경한은 그곳 어부의 보살핌으로 살아남았다. 황경한의 일부 후손들이 지금도 추자도에 살고 있다. 천주교는 그 인연을 기려 추자도에 공소를 설립했다.
다산과 손암은 배교(背敎)를 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유배를 갔다. 배교만이 살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산은 의금부 조사 과정에서 천주교도들의 실체 파악과 검거에 협조했다. 조선시대 의금부에 넘어온 중죄인의 조사·판결서를 모은 추국(推鞫)기록문서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 한국연구재단 지원으로 전주대학교 고전국역총서 150권으로 번역됐다. 이 추안급국안에 다산의 행적이 상세히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