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념 강제추방으로 죽어간 이주노동자/동포 추모제에 참석한 명동성당 미등록 이주노동자 농성투쟁단(2003.12.18.)(좌), 2023년 11월 26일 열린 [집담회: 담대한 이주-노동자의 꿈](우)
이상재(좌), 아카이브모임(우)
투쟁을 한다는 건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관계가 바뀐다. 평범했던 일상은 흔들린다. 세상의 비난과 손가락질에 맞서는 용기도 필요하다. 하물며 '남의' 나라에서라면 더욱.
2003년 11월 15일 서울 도심 한 가운데 명동성당 들머리. '단속추방 중단!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요구하며 380일 동안 농성했던 미등록 노동자들에게 이 투쟁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11월 26일 열린 '집담회 : 담대한 이주-노동자의 꿈'에서 당시 농성에 참여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글은 현장에서 나온 이들의 목소리를 일부 발췌하여 함께 엮고 재구성한 것이다.
20년 지난 후, 명동성당에 있던 그들은 지금
투쟁문화제가 있는 곳이면 머리띠를 묶고 무대에 올라 춤을 추었던 선주(본프렘 씽)는 네팔로 돌아가 커피 재배가공업을 하고 있다. 농성단에서 말 잘하는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웠을 라주(아쉬라풀 이슬람)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농성단 투쟁국장을 맡았던 자이드(사이드 무나)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가 방송국 일을 하다가 해고되었다. 현재는 건설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자이드와 함께 투쟁국장을 맡았던 마문(섹알 마문)은 한국에서 결혼 이주민으로, 현재 이주노조(MTU) 수석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농성단 대표 서머르(서머르 타파)는 혜화동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던 중 표적 단속으로 체포되어 강제 출국당했다. 네팔로 돌아가서 노동운동, 사회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하고 있다.
- 2003년 11월 15일 농성에 처음 참여할 때 어떤 마음이었나?
선주 : "1999년에 연수생 비자로 한국에 왔다. 그때는 한국에 가려면 천만 원 가까이 돈이 필요했다. 돈이 없어 빌려서 한국에 가는데, 이자도 줘야 했다. 3년 동안 그 돈을 다 벌 수 없으니 미등록 상태가 되었다. 그때 우리 최저임금이 19만 원이었다. 연수생 계약서에는 '6시간은 일하고 2시간은 관련된 곳에서 공부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야근할 때는 14시간, 주간일 때는 11시간씩 일했다. 야간수당, 연장수당 같은 건 아예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연수생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다치거나 죽어도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3년 한국 정부가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을 법무부, 경찰 등 부처 간 합동단속을 해서 추방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24시간 단속해서 미등록 상태에 있으면 언제든 잡아갈 수 있다고 했다. 답답해서 심장병 있는 사람들은 그냥 죽기도 했다. 불법체류자들에게는 일을 안 준다고 하니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고 단속추방을 피해 도망가다가 다쳐서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우리도 단속추방을 피해 방을 하나 얻어 방 안에만 있었다. 2~3주 정도 있으니까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돈도 없고 일도 없고. 어떤 친구가 명동성당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합법화하고 노동 비자를 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농성하고 있다고 해서 명동성당 농성단에 참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