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모둠토의와 동시에, 발표를 위해 벽보를 만들고 있는 학생들
안사을
한 시간 반 정도 각 원탁별로 토의 및 자료 제작이 이루어졌다. 평소 이런 방식의 수업에 익숙한 아이들은 별다른 질문 없이 2절지에 자기 모둠의 생각을 잘 정리했다. 나머지 한 시간 반 동안에는 모둠별로 결과물에 대한 발표가 이루어졌다. 교사로서 떨리는 순간이었다. 과연 아이들은 모두의 앞에서 수업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발표는 다소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우리 학교의 교육을 명사형으로 표현해보는 것이었다. 인상 깊은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보물찾기'이다. 인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을 느낄 수 있었는데 찾아가는 과정이 보물찾기 같았다.
- '공사중'이다. 아직 미완성인 대안교육이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 '다른 공부'이다.
- '신념'이다.
- '가능성'이다. 나에게 여러 길을 열어주었다.
- '줄넘기'이다. 각자 능력이 다르지만 모두가 할 수 있고, 할수록 늘기 때문이다.
각각의 단어가 하나의 시어 같았다. 함축적으로 만들어낸 단어를 발표자가 말할 때마다 아이들과 교사들은 감탄의 환호성을 저절로 뱉어냈다. 날카로운 비판에 앞서 우리의 교육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1년의 세월을 보람있게 보낸 아이들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발표는 민감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사 모둠에 자리한 교사가 담당하는 교과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 또한 그랬고, 발표를 듣는 동료 교사들의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과목에 관한 내용은 우리 안에서 나누고, 내 수업에 관한 비판 어린 발표를 공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 뮤지컬 수업이 한국사 수업과 연결된다는 점과 역사에 관련된 내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좋지만 안사을 선생님 혼자 정하지 말고 학생들이 직접 알아보고 조사해서 주제를 정했으면 좋겠다.
- 한 사람이 뮤지컬 곡을 모두 창작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알지만 1학기는 너무 흐지부지 보내고 2학기 끝자락에 급급하게 녹음과 연습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시간 분배를 좀 더 고민하고 잘했으면 좋겠다.
급급하다니. 학생이 교사에게 대놓고 할 수 있는 말인가. 어느 학교에서 이런 말들이 공개적으로 오고 갈 수 있을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이의 진심이다. 위 내용을 발표하는 학생은 사뭇 진지했지만 발표 내내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의 태도가 참 고마웠다.
새 학기가 되면 위 의견을 그대로 인쇄해서 아이들과 첫 수업 시간에 함께 토론해 볼 생각이다. 내 머릿속엔 당연히 타당한 반박들이 이미 있지만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누가 옳은가'보다 '함께 이야기하며 풀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업 외에 다른 부분에 대한 제안도 이어졌다.
- 학생과 선생님이 소통이 안 된다. 회의도 빨리 끝낼 수 있는 것을 오래 끌어간다. 학급 자치 때 학생이 주도해야하는데 자꾸 선생님들이 관여를 한다.
- 선생님 간의 차별이 많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있기도 한 것 같다. 성적에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아서 이 의견이 선생님에게 전달이 된다면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곳에 공개하지 못한 내용 중에는 각 과목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제안이 많았다. 담당 교사가 본다면 한편으로는 뜨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함께 개선해나가고자 노력하고픈 마음이 들 것 같았다. 물론 아이들이 얕게 판단하여 잘못 지적한 부분들도 없지 않지만,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과 지지를 얻어낸다면 그 역시 알찬 수업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본 토의를 기획한 교사는 결과물을 모두 수합하여 전 교원에게 배포할 것을 아이들에게 약속했다. 개선을 요구하는 작은 목소리가 실제로 교사들에게 전달되고, 다음 단계로서의 논의의 장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만큼 아이들에게 효율적인 민주시민교육이 또 있을까.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이런 과정을 기획하고 아이들의 비판을 고스란히 교사들에게 전달한 젊은 교사를 과연 미워할 것인가? 장담하건대 아닐 것이다. 맨땅에 헤딩하듯 공립형 대안학교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날 선 토론과 발전을 위한 몸부림으로 이미 잔뼈가 굵은 우리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가장 민감한 주제에 대해 스스럼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했다는 것만으로 오히려 칭찬해 마지않을 것이다.
고교학점제를 앞두고
이번 원탁토의에 참여하며 무릎을 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고교학점제의 내실화에 관한 것이다. 현재 '고교학점제 선도학교'나 '연구학교'로 지정되어 이미 고교학점제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학교들이 많다. 본교는 내년이 되면 교육과정의 구성과 시행 모두 고교학점제의 시스템으로 전면 운영해야 한다.
고교학점제의 본질은 학생 중심, 역량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진로 맞춤형 교육이라는 허울 아래 대학에서 원하는 과목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형적 모양새다. 학생이 배우기 원하지만 가고자 하는 대학이 반영하는 교과가 아니면 선택할 수 없다. 고등학교의 교육이 본질이 되지 않고 수단으로 전락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