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살 아들과 떠난 엘니도 여행은 모자 사이를 살뜰하게 붙들어주었다.
박희정
아들아이가 만든 동선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플랜 B, 플랜 C를 복안으로 갖고 있어서 이러이러하다고 말하면 유연하게 동선을 고친다. 휴대폰을 바다에 빠뜨린 일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도리어 그 생각을 하면서 깔깔댈 수 있었다.
만살라잇 등산 가이드는 말수가 적었다. 그래도 한국에 가봤다는 말을 수줍게 하더니 너무 물가가 비싸서 한국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악덕 업주에게 월급을 떼었단 말을 듣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산했다. 정비가 안 되어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일단 정상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전망이 펼쳐져서 호연지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낙판비치도 쌍둥이 비치도 까마득하게 보인다. 낙판비치는 거짓말 보태지 않고 하와이보다 더 좋았다. 한 가지 빠지는 게 있다면 현지인들의 열악한 삶이다. 하와이는 여행자와 거주민이 동등한 관계지만 이곳은 여행자가 돈으로 거주민들을 부린다. 동남아 여행의 불편함은 거기에 원인이 있다. 그릴 스퀴드와 큐브 비프 스테이크의 맛이 혀에 살살 녹아도 진주 액세서리나 바나나를 들고 행상을 하는 아이들을 보는 일은 괴롭다.
쓴맛, 단맛 다음에는 홀가분이었다. 세 번째 날 호핑투어를 함께 한 일행과 뒤풀이를 했다. 스몰라군, 히든 비치, 시크릿 비치, 카트라우의 풍광에 홀려버렸다. 시크릿 비치로 들어갈 때 한창 학교 다닐 꼬마가 내 손을 꼭 잡고 수영을 돕는다.
어른인 나는 스노쿨링 장비가 짱짱한데 꼬마의 장비는 허술하다. 마음이 짜르륵 아파왔다. 팁과 함께 한국에서 사 간 스노쿨링 장비를 선물로 주었다. 서로 찍은 사진을 나누기 위해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아들과 나는 처음으로 헤어져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눈이 번쩍할 정도의 비경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구경은 드라마틱한 여행 경험을 줄줄이 쏟아놓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아들은 지금 혼자서 뭐를 할까? 싶어 2차를 가야 하는 자리에서 홀로 빠져나왔다.
언제 아들 손을 놓을 거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호텔로 돌아오니 아들도 혼자만의 시간을 낭만적으로 즐기고 왔다고 좋아한다. 당연한 일이다. 여행 경험이 남에게 뒤지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여행지에 갈 때마다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는 나와 달리 아들은 뭐든지 물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여행은 성공했다. 쓴맛, 단맛, 그리고 홀로서기를 선물 받았다. 돌아가는 날 봐뒀던 호텔을 예약했다면서 메일을 보여준다. 고된 여행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호사로운 여행은 도리어 금방 잊는다고 하지만 이번 여행은 예외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구동성으로 우린 말했다.
24살 아들과 떠난 엘니도 여행은 모자 사이를 살뜰하게 붙들어주었다. 더불어 이젠 그 손길을 놓고 훨훨 날아가도록 해야겠다는 다짐도 안겨줬다. 엘니도는 그래서 특별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일상의 기록을 소중하게 여기는 기록중독자입니다. 차곡차곡 쌓인 기록의 양적변화가 언젠가 질적변화를 일으키길 바라고 있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