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김평수씨의 생전 모습(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퇴원한 뒤 병원 관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김용희씨 제공
평수씨는 학생 때부터 아버지 일을 도왔다. 아내를 만난 뒤 포장마차와 라멘 가게를 차렸고, 불혹이 넘어서는 건강식품 회사를 경영했다. 많은 재일제주인이 소규모 공장을 운영하면서 자립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기피한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업종이 우리 동포 몫이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밥 먹고 살려면, 야쿠자를 하든지 의사를 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동포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재일제주인 3세, 제주로 유학 오다
용희씨는 2021년 9월 제주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주에 왔다. 말로만 듣던 제주도였다. 요코하마에서 학교를 다닌 그에게 제주는 늘 역사의 장소였다. 학교에서 배운 4.3학살의 아픔이 서린 땅. 눈으로 만난 제주는 특히 바다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제주는 조용하고 평온해요.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도쿄는 늘 사람으로 붐비거든요. 수도권 학교에는 아무래도 일본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으니까 일부러 제주에 온 것도 있어요. 현지인과 어울리면서 문화도 배우고 한국어도 빨리 더 잘하고 싶었거든요."
공부 욕심이 앞섰던 걸까? 복수전공까지 신청했더니 수업은 따라가기 벅찼다. 부모님이 지어준 한글 이름 석 자까지 애를 먹였다. 먼저 말하기 전까지 용희씨가 교포 학생인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혼자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학생은 유학생끼리 비교해 성적을 내지만 교포 학생은 한국 학생과 경쟁해야 한다. 유학생은 학생회도 따로 두는 등 소통 창구가 열려있지만, 의지할 데조차 없는 교포 학생들은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교포 학생도 한국 학생들이랑 교류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운 좋게 취미활동이 겹쳐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는데, 일단 한국어가 늘려면 한국 친구가 정말 필요하거든요. 잘 섞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해요."
우여곡절 끝에 올해 3학년이 되는 용희씨. 어쩌다 보니 가족 중 할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오래 제주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장례를 치를 때 온 게 전부였다. 형과 누나들은 고모가 사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뒤를 이어 미국 유학길에 오르려 했지만, 코로나19로 무산됐다. 그때 알게 된 게 '재일본 제주 출신 교포자녀 미래희망장학' 제도. 관서‧관동제주도민협회에서 추천서를 써준 학생에게 학교가 장학금을 지원한다.
고향 땅 밟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
"재일동포 1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오지 못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스스로 도피자라 여기는 죄책감 때문이거나 우리나라에서 입국을 차단하는 경우예요."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 KBS 신년대담에서 "지난 남북정상회담에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며 "보여주기식 외교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윤 대통령식 '실리외교'는 고향 땅만 밟길 간절히 기다리는 동포들을 외면한다. 통일국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분단 이전의 '조선적'을 선택한 이들에게는 높은 장벽이다. 조선적 재일동포의 자유로운 모국방문 논의가 이뤄진 건 전임 정권이 마지막이다.
강경희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은 "이전에는 조선적을 가진 동포들에게 길을 터주는 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며 "조선적 재일동포 중에 제주 사람이 많아서 제주도청에서도 고향 방문 기회를 마련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재일 사회의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건 바깥 사회다. 남북관계가 긴장 상황에 놓일수록 조총련과 민단 사이에 선명하게 선이 그어졌다. 현 정권에서는 국가보안법을 명분으로 남북 교류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지난해 통일부는 6.15공동선언실천 일본지역위원회 주최 행사에 초청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에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강 연구원은 "조총련과 민단은 이념적으로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의 동포라는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며 "현 정권에서는 허가받지 않고 조총련 관계자를 만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동포를 분리한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대담 끝에서 "북한 주민은 우리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했지만, '우리 국민'을 적대시하는 정부의 대응과 시책이 두 조직을 갈라서게 만든다.
"너희 학교에서 이상한 거 배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