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생에 대해 고생은 하지 않고 이득만 누리는 '꿀빨러'라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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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각종 문제들을 둘러싼 세대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60년대생에 대해 고생은 하지 않고 이득만 누리는 '꿀빨러'라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다. 나의 생각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지만 60년대생과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70년대 초반생으로서 그들을 '꿀빨러'로 폄하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어떤 면에서도 그들이 인생에서 꿀맛만 누린 세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0년대생을 떠올리면 대개 386, 민주화운동, 넥타이부대 등을 연상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20대를 보냈던 1980년대의 험난했던 시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다뤄졌던 것처럼 신군부 쿠데타 세력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80년대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그에 따른 사회적 저항이 강하게 분출되었던 시기였다.
대학 진학이 보편화된 요즘과 달리 취학인구의 10% 남짓한 소수만이 진학했던 80년대 초의 캠퍼스 또한 시대의 영향으로 젊음의 자유, 낭만보다는 군부 정권이 자행하던 불의에 대한 분노가 분위기를 지배했다. "청바지를 입은 백골단(경찰)이 학교 안에 상주하다시피 했고, 시위를 하다 붙잡히면 곤봉으로 엄청 두들겨 맞은 후 질질 끌려갔다"는 그들의 얘기가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그런 분위기에서 많은 60년대생이 진보적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때도 젊음을 즐기던 부류들이 있었지만 60년대생의 다수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대학생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군부 정권에 맞서 다양한 모습으로 저항했다. 나는 그 험난했던 시기에 사회적 불의에 맞섰던 많은 60년대생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 그들이 더 나은 사회를 갈망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한 덕에 우리 사회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 중의 몇몇이 자신의 경험을 발판으로 정치계에 진출했지만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평범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30대였던, 2002년 대선에서 진보 성향 후보에게 60% 가까운 지지를 보냈던 60년대생들은 시간이 지나 50대를 훌쩍 넘겨 치른 2022년 대선에서도 여전히 과반 이상이 진보 성향의 후보를 지지했다. 어느덧 60대 전후의 연배가 된 60년대생에 대해 한 보수신문은 '나이가 들면 보수화된다'는 연령효과를 압도해 젊은 시절 형성한 진보성향의 정치 인식을 계속 가지고 있는 세대라고 평가했다. 그들이 나의 선배들이고 지금 20, 30대의 부모들이다.
고성장 시대의 60년대생
풍족함과는 거리가 먼, 항상 부족했던 어린 시절을 살았던 60년대생들은 그들이 사회에 진출할 무렵부터 이어진 경제적 고성장 시대의 혜택을 누렸다. 1988년의 12%를 비롯해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직전까지 매년 7~9%의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양질의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의 20, 30대가 직면하고 있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전체의 40%가량에 이르는 계층화된 노동시장의 상황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때도 내 집 마련은 쉽지 않은 과제였지만 전세라는 징검다리가 폭넓게 작동했고, 월급을 쓰지 않고 꼬박 15년을 모아야 서울에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지금과 같은 수준은 아니었다. 전국의 월세 비중이 30%에 달하고 서울만 놓고 보면 50%가 넘는다는 요즘과 달리, 1990년의 월세 비중이 10% 수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때의 여건이 지금보다 양호했던 것은 분명하다. 60년대생이 지나온 이런 시대 경험이 그들을 '꿀을 빤 세대'인 기득권층으로 칭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60년대생을 정말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을까?
60년대생, 생계형 기득권 세대?
사전적 정의로서 기득권은 특정 개인이나 국가가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이미 차지한 권리, 사회의 지도자층이 가지고 있는 권리, 혹은 오래전부터 특정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객관적 설명과는 다르게 기득권은 제도화된 '정당한 과정'을 통해 획득한 권리에 더해진,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부가적 권리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특정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사수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제도의 변화를 반대할 때 제기되는 '기득권 사수'라는 비판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60년대생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 무엇인지, 그들이 기득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성인이 된 60년대생들은 자신의 청소년, 청년 시기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의 삶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인간적 노동 환경에 항거해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던 1960년대와는 달랐지만, 60년대생들은 직장과 사회를 우선시하며 여전히 열악한 상황에서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던 시대를 살았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권위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권위적인 윗대와 상대적으로 탈권위적인 아랫대의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게 살았던 세대이기도 하다.
90년대 후반, 사회를 강타한 IMF의 충격을 사회의 한복판에서 정면으로 받은 세대였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삶을 극적으로 표현할 생각은 없지만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그들의 삶도 상당히 고단했다는 것이다. 외형적인 성장은 거뒀지만 여전히 취약한 사회제도 하에서 60대에 진입한 60년대생이 구직 시장에 내몰리면서 2023년 60세 이상의 고용률은 2003년의 32%, 2013년의 32.8%에 비해 크게 증가한 42.8%로 나타났다. 이들이 퇴직 후에도 다시 노동 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생계다. 생계를 위해 자영업 대열에 합류하면서 60대의 자영업자 비율이 36.4%에 이른다. 이런 60년대생들을 젊은 세대의 몫을 움켜쥐고 있는 세대라고 비난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60년대생에 대한 아쉬움과 바람
60년대생에 대해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60년대생들이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 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경험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다소 과하게 권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정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웠던 것은 존중하지만 때때로 그들 안에 남아 있는 권위적 태도를 경험할 때마다 심한 거부감이 든다.
또한, 그들이 험난했던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사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면서, 후배 연령대인 70년대생이 다양한 경험을 쌓고 역할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특정 분야의 예외적인 것일 수 있지만 21대 국회에서 60년대생(86세대)의 비율이 58%를 기록해, 70년대생(14%)의 네 배 가까이 많았던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서서히 민주화세대로서의 자부심을 내려놓고 사회의 미래를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필요한 새로운 역할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