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에 대해 생각하며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펼쳤다. 우에노 치즈코의 책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와 다니엘 페나크의 책 <몸의 일기>. 뭐든 안 그럴까만은 존엄은 몸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보였다. 얼마 전에 읽었던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너무 밋밋한 제목이라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내내 마음에 많이 남는 책이 되었다.
이진순
아직 설익은 존엄사법이라는 단어보다는 연명의료법, 조력사법 등 사실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존엄을 이야기하기에는 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재의 연명의료법이나 조력사 법안은 죽음을 앞둔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육체적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연명의료를 중단했다고 해서 고통이 자동적으로 최소화되지는 않는다. 고통의 최소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사회의 돌봄이다. 연명의료법의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다. '호스피스‧완화의료'가 돌봄을 다루는 부분인데, 이 법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한국 사회의 척박한 완화의료의 현실은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한 존재의 존엄한 생사 위해, 서로 돌볼 준비가 되어있는가
지난 2008년 영국 정부는 '좋은 죽음'을 '익숙한 환경에서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가족 및 친구와 고통 및 기타 증상 없이 맞이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이런 죽음을 실현하기 위해 영국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전국적으로 시행해왔다. 그 결과 영국은 호스피스 이용률이 95%에 이르는 나라, '죽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은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는 대상자도 애초에 대단히 한정적인 데다가, 그 대상자 중에서도 21.5%만 이용했다고 한다(중앙호스피스센터 2021년 통계). 이는 대략 50~60%에 달하는 미국과 대만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이다. 어렵게 호스피스 이용 대상자가 되어도, 자리가 없어서 대기자로 등록돼 있다가 죽음을 맞아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한 사회의 존엄한 생과 사의 지수는 그 사회의 돌봄 지수와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도, 조력사를 시행하는 것도 어쩌면 넓은 의미의 돌봄일 수 있다. 견디기 힘든 고통 앞에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갖는 것은 충분히 사회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논의해 볼 만한 주제이다.
그런데, 존엄한 죽음이란 주제는 단지 임종 순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길과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툴 가완디는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한 존재의 존엄한 생과 사를 위해 우리 사회가 서로를 돌볼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다양한 죽음의 제도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때 우리는 단순히 제도에 대한 찬반양론 속에 존엄이 수난을 겪는 단계를 넘어 존엄의 나무, 존엄의 숲을 가꾸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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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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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존엄'이라는 나무를 이제 막 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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