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내게 걸어온 말들 표지숲이 내게 걸어온 말들 카드뉴스
설렘
여러분은 영화 한 편을 보고 사흘 동안 내리 운 사람이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영화 한 편을 보고 사흘 동안 운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접니다. 저를 사흘 동안 울게 만든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3 학년 때 아버지의 병환으로 꿈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실까 봐 두려웠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저와 다섯 명의 동생들이 먹고살 길이 막막했으니까요.
그래서 가족을 위해 일을 했습니다.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꿈을 꾹꾹 누르면서요.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숨죽여 울면서요. 이후엔 틈만 나면 불쑥불쑥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는 꿈을 모른 채 외면하고 살아왔습니다.
60살 즈음였어요. 흙을 뒤집어쓴 채 땅바닥에서 뒹구는 낙엽 같은 저를 발견했습니다. 비에 온 몸이 젖어 떨고 있는 낙엽 같은 저를 말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며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왔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물 한 방울 정도의 보람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슬 한 방울의 보람도 느낄 수 없어서 참담했습니다.
저는 늪에 빠진 듯 허우적거렸습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 이대로 살아간다면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의 욕구를 들어주며 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나의 욕구를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나의 욕구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가 보고 싶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궁금했거든요. 영화를 보면서 내내 울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더라고요.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요. 목구멍까지 차올라온 울음을 뱉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제가 울더라고요.
이 울음은 어린 제가 밤마다 울던 그 울음이었어요. 그렇게 사흘 동안 울었습니다. 영화를 본 후 마음이 평정해지기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의 욕구를 알아채고 나의 욕구를 들어주며 살기로 다짐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수십 년 그래왔던 것처럼 시지프스의 돌을 굴리며 삶의 산 위로 올라갔다가 도로 떨어져 내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제가 책을 쓴 이유는 책을 쓰는 동안에는 시지프스의 돌에서 놓여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동식물 이야기와 더불어 제가 시지프스의 돌을 놓아버리기 위해 애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드라마 <나빌레라>를 보였나요? 이 드라마는 주인공 칠순의 심덕출 할아버지가 어릴 때 배우고 싶었던 발레를 배우는 이야기입니다. 책에도 심덕출 할아버지 이야기를 썼습니다만, 심덕출 할아버지가 발레를 배워서 콩쿠르에 나가 상을 받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려는 게 아니잖습니까?
심 할아버지는 그저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발레를 해보고 싶어서 애쓰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치매와 싸우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발레 공연을 해냈습니다. 이후 심 할아버지는 못해 본 것에 대한 갈증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이것은 심 할아버지가 어릴 때 못 배운 발레를 배우는 것과는 다릅니다만, 마음은 같습니다. 바로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역량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죠.
저는 저의 최대 역량을 발휘해 보고 싶은 그 무엇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책을 쓰는 일은 그 무엇을 찾는 과정입니다. 저는 다시 한 권의 책을 쓰기로 했습니다. 나로 살아내기 위해서요. 그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서요.
숲이 내게 걸어온 말들 - 20년 차 숲 해설가가 만난 식물들과 삶의 이야기
최정희 (지은이),
설렘(SEOLREM), 2024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20년차 숲해설가, 생태공예연구가, 새내기 자연에세이작가입니다.
공유하기
영화 <82년생 김지영> 보고 70살에 첫 책을 냈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